▒ 반전의 예술사 ⑩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 단절되지 않은 역사도 때로는 왜곡된다
   



[ 2011년 10월호 ]
 
반전의 예술사 ⑩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단절되지 않은 역사도 때로는 왜곡된다

음악사에서 헨델의 이름은 늘 바흐와 함께 붙어다닌다. 그들의 삶에 공통분모가 많기는 하다. 두 사람은 똑같이 1685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전편에서 밝혔듯, 바흐처럼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 북스테후데를 찾아갔으며, 북스테후데는 바흐와 똑같이 헨델에게도 사위가 되지 않겠냐고 제의했고, 바흐처럼 헨델 또한 이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말년 풍경도 비슷하다. 젊은 시절부터 어두운 곳에서 너무 자주 악보를 베낀 결과로 두 사람 모두 일찌감치 시력에 이상이 생겼고, 똑같이 영국 의사로부터 눈 수술을 받았으며, 둘다 성공하지 못해 장님이 되었다. 심지어 바흐는 이 수술의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헨델은 다행히 목숨을 건져 바흐보다 9년이나 더 살다 1759년 세상을 떠났다.

같으면서 다른 삶-헨델과 바흐
이러한 점들을 제외한다면, 헨델은 바흐와 전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여러 형제들 중 눈에 띄지 않는 한 명으로 태어났지만 헨델은 집안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똑똑한 기대주로 태어났다. 음악이 가업이었던 집안에서 바흐가 음악가가 되는 것은 당연했지만, 외과의사였던 헨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을 공부해 가문의 영광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 아들이 신분도 낮은 음악가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부모가 알았을 때, 집안은 당연히 발칵 뒤집어졌다. 그러나 워낙 오냐오냐 자라 거칠고 열정적이었던 헨델의 성격은 쉽게 말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법대에 입학한 헨델은 아버지의 마지못한 동의 아래 1년 동안 교회에서 수습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뛰어난 재능 덕에 정식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자마자 헨델은 지루한 법률과 즉각 인연을 끊었다.

성장 분위기에서 짐작 가능하겠지만, 기본적으로 헨델과 바흐는 다른 품성으로 성장했다. 바흐는 음악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이상적인 가장이었다. 직장인 교회에 충실했고 늘 소박했으며 근면하면서도 많은 아이들을 낳아 그들을 부양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반면 헨델은 다분히 거칠고 열정적이며 기분파적인 인물이었다. 한 번의 도박으로 대박을 꿈꾸는 흥행사 기질이 다분했던 헨델에게서 안정된 직장이라든가 행복한 가정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쁜 남자’는 매력이 있게 마련이다. 헨델 또한 젊은 시절 분명 그러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외적인 매력은 헨델의 음악적 재능과 결합하여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증거로 아직 무명 음악가에 불과했던 젊은 시절 헨델은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로마에서 교황청을 사로잡기도 했다. 추기경들은 저마다 대본을 들고 헨델을 찾아와 음악을 작곡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자금을 대주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그러나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던 헨델은 권력과 돈에 스스로를 의탁하기보다는 자수성가의 길을 택했다.

주경야독의 고생 끝에 헨델은 이탈리아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탈리아 양식을 완전히 마스터한 뒤 1705년 겨울 헨델은 함부르크로 돌아와 오페라 <알미라>를 무대에 올렸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에게는‘위대한 작센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고,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열렬한 환영이 이어졌다. 게다가 헨델은 워커홀릭이었다. 오늘날 영국 헨델협회에서 출판한 것만 따져도 헨델의 작품은 거의 1백 권에 육박한다. 이 가운데에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41권, 이탈리아 오라토리오 2권, 독일 수난곡이 2권, 영국 오라토리오 18권, 테 데움 5권, 대관식 찬가 4권, 기악 소나타 37권, 오르간 곡 20권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존재하던 거의 대부분의 장르를 섭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나아가 헨델은 음악가로서 만족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극장 자금 운영에서부터 무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작품과 관련된 모든 일에 일일이 관여를 해야 직성이 풀렸다. 제 아무리 강철 체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이쯤 되는 업무량이면 목숨이 위험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과로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을 고비에 직면하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죽었겠지만 헨델은 죽지 않았다. 용하다는 의사, 몸에 좋다는 온천, 희대의 명약 그 모든 것들을 수소문 끝에 찾아다니며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불사조에 천하무적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은 공평한 법이다. 헨델이라고 모든 일들이 다 수월하게만 풀렸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성격이었다. 즉흥적이고 다혈질인데다가 사리사욕만 밝히는 천성 때문에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뒤 헨델은 하노버 선제후의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런던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고 1년의 휴가를 얻어 영국에서 활동을 한 그는 영국에서의 수입이 하노버 궁정악장으로 있는 것보다 훨씬 짭짤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재차 양해를 구해 영국으로 건너간 헨델은 선제후가 허락한 휴가가 끝났지만 하노버로 돌아가지 않았다.

1714년 영국을 통치하던 앤 여왕이 죽으면서 헨델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으면서 제임스 1세의 외손자인 하노버 선제후가 조지 1세로 즉위하면서 영국 왕실에는 소위 하노버 왕가가 시작되었다. 즉, 헨델의 전 고용주가 영국의 왕이 된 것이다. 허락 없이 도망 나온 탈영병 신세나 다름없었던 헨델은 언제 처형을 당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옛 주인을 맞이했다. 템스 강에서 펼쳐진 왕실 파티를 위해 만든 ‘수상 음악’은 바로 이때 작곡된 것이다. 이 작품에 크게 흡족한 조지 1세는 결국 배신자를 용서하고 다시 고용했다. 재능이 스스로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메시아>로 성공한 말년의 인생역전
국왕으로부터 용서도 받고, 연금도 받으면서 헨델은 대중들을 상대로 평탄하게 오페라를 작곡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영국에는 자기 말고도 이탈리아 풍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경쟁 작품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심지어 입장료마저 헨델의 작품보다 저렴해서 헨델은 작품을 올리는 족족 흥행에 참패해 결국 연금을 받으면서도 빚더미에 올랐다. 뇌졸중은 바로 이 시기에 찾아왔다. 독일로 돌아가 뜨거운 온천에 보통 사람보다 세 배나 오래 몸을 담근 결과 위기는 넘겼지만 반신이 마비되어버렸다. 금전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불편해진 헨델은 저예산으로 그리 많은 노동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드라마틱하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오라토리오였다. 오라토리오는 17~8세기에 유행하던 종교극음악으로, 성서에 입각한 종교적 내용을 연기나 무대장치 없이 노래만으로 전달하는 장르이다. 그중에서도 헨델의 대표적인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바로 이런 불순한 의도에서 작곡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이 과정에서 돈에 눈이 멀어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 이 숭고한 종교음악을 그는 관객이 더 많이 모인다는 이유로 교회가 아닌 유흥과 쾌락의 장소인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초연하려는 우를 범했으며, 신성모독이라 여긴 청중들은 이를 외면했다. 헨델의 <메시아>는 초연은커녕 조롱 속에 작곡가와 더불어 영국에서 완전히 퇴출될 위기에 몰렸다. 그런 와중에 더블린의 자선음악단체인 필하모니아 협회로부터 작품 의뢰가 왔다. 더블린은 헨델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미개척의 땅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적도 없었다. 1742년 <메시아>의 초연은 그렇게 런던이 아닌 더블린에서 이루어졌다.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불굴의 역전용사 헨델도 다시 부활했다. 더블린 공연 당시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몰려들었던지, 헨델의 공연을 보러 가는 부인들에게 당시 유행하던 치마를 펑퍼짐하게 부풀리기 위해 치마 안에 착용하던 후프를 벗고 올 것을 당부하는 안내문이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헨델의 명성은 더블린에서 본토로 다시 역바람을 탔다. 입소문으로 들려오는 <메시아>의 감동을 런던 시민들도 직접 경험하고 싶어 했다. 이번에는 코벤트 가든에서 연주하는 데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헨델이 흥행 전략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더블린 공연은 자선공연이었을지언정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하고도 헨델에게 꽤 쏠쏠한 수익을 남겼다. 헨델은 공연을 교회가 아닌 일반 세속 오페라극장에서 하는 대신 수익금의 일부를 빈민들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밝혀 관객들의 호의를 자극했다. 두 번의 코벤트 가든 공연 이후에는 빈민과 죄수들을 도와주는 구호소로 유명했던 파운들링 병원의 조그마한 예배당으로 아예 무대를 옮겼다. 공연 수익금이 병원에 기부된다는 소식과 더불어 공연에 관한 리뷰가 언론에 우호적으로 실렸고, 특히 공연을 관람하러 온 당시 국왕 조지 2세가 ‘알렐루야’ 합창 때 기립을 하고 들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점차 <메시아>는 헨델의 대표적인 작품이자 영국의 국민합창곡으로 자리를 잡았다. 헨델은 죽으면서 유언장을 통해 <메시아> 자필 악보를 파운들링 병원에 기증했다.

1759년 작곡가는 죽었으나, 음악은 죽지 않았다. 헨델이 죽은 이후에도 <메시아> 열풍은 단 한순간도 단절되지 않고 꾸준히 이어져 대대로 연주되었으며, 심지어 신대륙에까지 전해졌다. 작곡가 생존 당시에 몇 번 연주되다 주인이 죽으면 그와 함께 땅속에 묻혀버리던 것이 당시 작곡된 음악들의 운명이었다. 심지어 바흐의 칸타타는 주일날 연주되면 그 친필 악보는 다음 날 월요일에 생선을 싸는 포장지로 사용될 정도였다.
<메시아>는 달랐다. 영국은 아예 3년마다 <헨델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정기적으로 <메시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페스티벌이 이어질수록 <메시아>를 연주하는 스타일도 점차 변화했다. 헨델 생존 당시 10명 안팎의 합창단이 초연했던 <메시아>의 규모는 헨델이 죽고 난 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1784년 런던 공연에서는 무려 525명의 합창단원들이 동원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786년 베를린에서는 190명의 합창단에 189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동원되었으며, 1853년 미국 보스턴 공연에서는 600명의 합창단이, 1857년 런던 공연에서는 2,750명의 합창단이 출연했다. 1869년 보스턴에서는 역사상 최대 블록버스터 <메시아> 공연이 펼쳐졌다. 야외에서 벌어진 이 무대에 출연한 합창단은 규모만 1만여 명에 육박했으며 오케스트라 단원도 500명을 넘어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품이 무분별하게 팽창되고 왜곡되자 입성 사납기로 소문난 버나드 쇼는 글을통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왜 그리도 음악을 가만 놔두지 못해 안달인가. 길지 않은 인생, 살다죽기 전에 가장 좋은 연주‘딱 한 번’만 듣고 가면 그만인 것을.”



글·사진 제공 _ 노승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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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림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월간 ‘객석’ 음악담당기자를 역임하였으며 이후 성남아트센터 홍보부 과장,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문화정책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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