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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페이지 내용 :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를 말하다” 성악가 박수길 (국립오페라단 6대 단장 겸 예술감독, 1995-2002) 국립오페라단이 재단법인화하면서 국립극장 산하단체에서 예술의전당 상 주단체로 바뀐 시점이 2000년이었고 당시 국립오페라단장을 맡고 있었다. 사실 굉장히 급작스럽게 진행된 일이어서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산 확보가 큰일이었다. 국립극장 시절에는 독자적인 수입-지출 구조가 아 니었을 뿐 아니라 따로 대관료를 내지 않고 무대를 사용했으므로 겉으로 드 러난 예산이 워낙 적었다. 그런데 예술의전당 상주단체가 된 다음에는 무대 를 사용할 때마다 정해진 사용료를 내야 했으므로 기본적인 지출 규모가 커 졌다. 그렇다고 새로 출범한 재단에 처음부터 넉넉한 국가 지원이 있을 리 없었다. 공연 날짜를 잡는 일도 쉽지 않았다. 오페라하우스 사용을 원하는 다른 여러 단체와 경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전당에 자리 잡은 이후 국립오페라단의 경쟁력이 많이 좋아졌 다. 재단법인이 되면서 독자적인 후원회 조직을 둘 수 있게 되었고 기업체 협 찬도 받을 수 있었다. 후원금과 협찬금을 받을 만한 좋은 공연을 만들고자 최 선을 다했고 그 성과가 점점 나타났다. 공연 횟수도 많이 늘릴 수 있었다. 또 예술의전당에서 외국 오페라하우스의 수준 높은 프로덕션과 예술의전당 자 체 기획 오페라, 여러 민간오페라단의 공연이 계속되어서 자연스레 국립오페 라단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큰 자극이 되었다. 처음 예술의전당으로 옮겼을 때는 첨단 무대장치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연출과 무대가 단순했고, 기술적으로도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다행히 후임 단장들 이 국립오페라단을 잘 발전시켜 주어서 요즘의 무대엔 감탄하곤 한다. 예술 의전당 오페라하우스는 외국에서 활약하는 우리 성악가들을 불러들이는 역 할도 했다. 세계 유수의 극장에 견주어 결코 못지않은 시설과 수준 높은 관객 이 우리나라에 있지 않은가. 꼭 국립오페라단 공연이 아니더라도 조국의 훌 2017.5.13 예술의전당 동요콘서트박수길 륭한 무대에 선다는 것은 성악가 개인 경력에 영광스러운 일이 되었다. 국립오페라단과 예술의전당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이런 저런 생각이 많다. 상주단체를 넘어 국립오페라단과 국립발레단이 주도적으 로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프로그램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 지만, ‘국립’을 지우고 그냥 예술의전당 산하단체로 들어가는 것은 답이 아닌 듯싶다. 뉴욕 링컨센터는 여러 공연장으로 구성된 복합예술공간이고, 공연 장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아메리칸발레시어터, 뉴욕필하모닉오케스 트라, 뉴욕시티발레단이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이런 모델이 바람직하지 않 은가 생각한다. BEAUTIFUL LIFE WITH SEOUL ARTS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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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페이지 내용 : 무용가 최태지 (국립발레단 3, 6대 단장 겸 예술감독, 1996-2001, 2008-2013) 1993년 3월 오페라하우스 개관기념 공연에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더블 캐스팅이었는데 다른 팀 주역이 부 상을 당한 바람에 모든 오데트와 오딜을 혼자 소화해야 했다. 새로 오픈한 최고의 오페라하우스 무대라는 흥분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걸 다 감당했을까 싶다.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발레 교육도 그 곳에서 받았지만, 일본 도쿄의 신국립극장보다 4년이나 먼저 개관 한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발레로는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이 다. 바다를 건너 국립발레단에 입단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누 리지 못했을 일이다. 국립발레단에서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 예술 감독이 되면서 좋은 공연을 경험하고 발레단에 이식하고자 하는 갈 망이 컸다. 그중 상당한 몫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가 해결해 주 었다. 특히 1990년대까지는 국내에서 볼 기회가 없었던 미국의 조프 리발레단, 아메리칸발레시어터, 뉴욕시티발레단의 공연을 오페라하 우스에서 차례로 접한 것은 엄청난 자극이었다. 2012.7월호 「예술의전당과 함께 뷰티풀라이프!」 인터뷰 당시 최태지 2000년에 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옮긴 것은 큰 위기이기도 했지만 축복 같은 결실을 봤다고 생각한다. 예술의전당 공연기획팀과 공동 으로 기획하는 기회가 생긴 덕분에 국립발레단의 힘만으로는 부담 스러웠던 레퍼토리를 수준 높은 프로덕션으로 하나씩 더할 수 있었 다. 더욱 중요한 성과는 오페라하우스라는 국제 수준의 극장 덕분에 그 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러시아 볼쇼이발레단의 유리 그리가로비 치, 모나코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장-크리스토프 마이요 등 세계적인 거장 안무가와 접촉하여 그들의 대표작을 국립발레단이 공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이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들이 마 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가로비치의 스파르타쿠스등 이다. 무슨 용기로 해냈을까 싶을 정도로 내 무용 인생에서 가장 뿌 듯하게 기억하는 성과다. 물론 문제도 있었다. 공연장은 훌륭했지만, 연습실 사정은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군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연습실 두 개 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마이요나 그리가로비치가 연습 상황을 보러 방문할 때마다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다 행히 2011년에 상주단체 연습동이 완공되어 지금은 오페라극장 무 대와 같은 크기의 연습실에서 실연과 같은 분위기로 준비할 수 있 다. 예술의전당이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 공연장으로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글·정리 유형종 (음악·무용 칼럼니스트)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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