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콘서트> 바리톤
서정학

퍼포먼스를 '아는' 오페라 스타

가수들이 매주 오페라 아리아를 소화하며 서바이벌 형식으로 대결한 한 케이블 채널의 프로그램 <오페라스타>가 또 한 명의 스타를 배출해냈다. 바리톤 서정학이다. 심사위원이자 멘토로 출연한 그는 <오페라스타>로 유명세를 얻게 됐지만 사실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일찌감치 세계 오페라계의 주목을 받은 우리나라 대표 성악가이다. 6월 <토크&콘서트> 무대를 앞두고 그의 음악과 인생 이야기를 살짝 먼저 들어보았다.

요즘 검색창에 ‘서정학’ 세 글자를 치면 관련 뉴스가 주르륵 쏟아진다. 이 정도 언론의 관심이면 연예인 못지않다. 대중가요 가수들이 매주 오페라 아리아를 한 곡씩 소화해 서바이벌 형식으로 대결한 <오페라스타>에서 심사위원이자 멘토로 출연하면서 얻게 된 유명세다. 도전가수들의 순위를 가르기 위한 시청자의 문자투표에 참가자가 아닌 서정학의 이름을 찍어서 보낸 팬들도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만나자마자 묻고 싶었다. 클래식 음악 하는 사람에게 그런 대중적 인기는 약일까, 독일까. “하하. 유명세라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죠.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되는 것! 음악 안에 예능이 존재한다면 무엇이든 오케이. 그러나 예능 속에 양념으로 음악이 사용된다면, 즉 예능을 위한 음악은 철저히 거절합니다. 관객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만족할 순 없지만 51퍼센트만 나와 공감한다면 환상적인 것 아닌가요?”

바리톤 서정학은 <토크&콘서트> 6월의 손님이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을 건넸다. “오늘의 자리는 <오페라스타>의 멘토가 아닌 인간 서정학, 바리톤 서정학에 대해서만 여쭤볼 겁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음악인생을 쏟아냈다. 서정학이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생이 될 무렵,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였다. 당시엔 일렉트릭 기타, 일명 엠프 기타가 붐을 이루던 때였다.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조금씩 자유의 바람이 불던 시대 상황 때문이었을까. 록 그룹도 서서히 고개를 들던 그때, 기타가 없던 집이 없었다. 각 학교마다 밴드가 생겨났다. 기타를 품고 있으면 자신과 맞아떨어지는 울림이 느껴졌다 한다. 그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무척 좋아해서 유물 탐험에 호기심이 많은, 음대 입시와는 상관없는 평범한 인문계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음악 선생님의 옛 제자가 학교에 놀러왔다가 음성이 남다르다며 음악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더군요. 그땐 그냥 지나쳤죠. 군대 갈 준비를 하던 중 우연히 그 형을 따라 서울대에 놀러갔어요. 자장면도 얻어먹고 학교 구경도 하고…. 형과 친구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연습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해볼까?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불쑥 들더라고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속담이 무색할 정도로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 두 달 정도 바쁘게 입시 준비를 했고, 그곳은 서정학의 모교가 되었다.

서정학은 서울대 음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9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가 주최한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보이시스(Pacific Voices)> 오디션에 통과해 미국 무대에 데뷔한다. 당시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음악감독은 젊은 동양인의 독특한 목소리에 흥미를 가진다. “성대가 튼튼하다고 놀라더군요. 아리아 10여 곡을 연이어 다 불렀거든요.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사실 콩글리시 수준이었어요. AFKN에서 본 걸 많이 써먹은 것 같아요. 하하.”

그때 그의 공연이 소위 ‘대박’이 나 미국의 에이전트와 계약을 맺게 되었고, 커티스 음악원에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오페라 무대에 서게 되면서 반 년 가까이 언어 트레이닝을 받았다. 한국에서 어느 정도 공부했다고 생각한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대화하는 것과 노래로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후 그의 화려한 이력이 시작된다. 1996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메로라 그랜드 파이널(Merola Grand Finals)에서 동양인 최초로 최고의 영예인 ‘Schwabacher Family Awards’를 수상했다. 199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한국 남자 성악가로는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섰다. 이후 미국 내 12개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 달라스 오페라단, 필라델피아 오페라단 등 미국 유수의 오페라단과 유럽 최고 극장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립극장에서 주역으로 서는 등 유럽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그의 커리어를 보면 다른 연주자와 비교해 굉장히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이뤘다는 느낌이 짙다. 20대의 나이에 뛰어난 기량으로 세계 무대에서 각광받은 서정학은 고공행진을 뒤로하고, 30대에는 음악과 삶에 대한 고찰의 시간을 보낸다. 그 시기 또한 한층 더 중후하고 깊이 있는 음악의 밑거름이 되었다. “가족의 수술과 죽음이 겹치며 2003년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혼란스러운 시기였죠. 그러던 중 예술의전당에서 기획한 <루치아>로 2004년 한국 무대 데뷔를 했습니다.” 당시 그는 4회 계속 원캐스팅으로 엔리코를 연기했다. 이후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아직도 공연이 있든 없든 일주일에 3회 이상 전문 피아니스트와 함께 독창 프로그램을 리허설합니다. 관객이 편안하게 마음을 열고 무대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은 바로 연습에서 나오거든요.”

7월부터는 예술의전당 음악아카데미에서 오페라 강좌를 맡는다. 오페라 탄생부터 고전ㆍ낭만ㆍ사실주의로 크게 나눠 6주간 강의할 예정이다.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적극적으로 수강생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될 겁니다. 저도 그분들의 연륜과 경험을 배우고 싶어요. 음악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과도 섞일 수 있다는 것이겠죠. 오페라에는 춤과 노래, 연기 등 모든 것이 녹아있어 흥미롭죠. 음악과 연주자와 관객이 한 공간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음악이듯, 강의실에서도 저와 수강생들이 오페라를 매개로 교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스스로 ‘연주자(performer)일까 예술가(artist)일까’ 항상 고민한다. 언제나 결론은 한 가지다. “저는 무대에 서는 사람이고 연주를 하지 않는 한 존재의 이유가 없습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의 인생사가 드라마처럼 그려지며 점점 그가 궁금해졌다. 음악가의 인생과 음악을 함께 풀어내는 <토크&콘서트>에서 나머지 호기심을 풀어보려 한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11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