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B시리즈 - 브람스 2011> 지휘자
임헌정

"들어라, 마음으로 노래하는 브람스를"

예술의전당이 3년에 걸쳐 기획한 위대한 작곡가 시리즈, 가 올해는 브람스의 교향곡과 협주곡 전곡을 탐구하는 시간을 갖는다. 지휘자 임헌정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총 4회로 꾸며질 ‘브람스 2011’. 3월에는 첼리스트 송영훈과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 협연으로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과 교향곡 제1번을 연주한다.


몇 개의 키워드만으로 대뜸 누군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려면 남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스무고개를 해보자. 다음 키워드를 접했을 때 떠오르는 이는 누구일까.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 터틀넥 셔츠, 그리고 전곡 연주 붐의 주역. 많은 이들이 쉽게 답을 떠올릴 것이다. 마에스트로 임헌정. 그가 올해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이하 부천필)를 이끌고 브람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한다. 장장 3년간 베토벤, 브람스, 바흐의 관현악을 집중탐구하는 예술의전당 기획 <3B 시리즈>의 일환이다. 3월 10일에 있을 첫 번째 연주를 앞두고 미리 만난 그는 “지휘자에게 브람스 심포니는 평생에 걸친 숙제”라며 “자주 연주해온 작품이지만 전곡 사이클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부천필과 함께 하는 것은 지난 2000년 이후 11년 만”이라고 했다.

브람스로 통하는 길을 안내하다
한 작곡가의 업적을 조명할 때 중심이 되는 것은 교향곡이다. 그 안에 모든 음악적 역량과 작곡가의 혼신이 집약돼 있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불후의 교향곡을 완성하는 것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았다. 또한 교향곡은 모든 악기와 모든 장르를 하나로 품어내는 거대한 음악이기 때문에, 독주악이나 실내악 등 교향곡을 제외한 나머지 음악들을 ‘교향곡에 이르는 과정’으로 여기기도 한다. 임헌정과 부천필은 오는 3월 10일부터 5월 12일, 9월 8일, 11월 10일까지 총 4회에 걸쳐 브람스가 남긴 네 개의 교향곡을 차례로 연주한다. 이달에 들려줄 제1번 교향곡은 브람스가 20대 초반부터 쓰기 시작해 2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뇌를 거듭하다가 40대 중반에 이르러 비로소 마무리한 작품이다. 청년의 혈기와 질풍노도의 감정, 중년의 원숙함과 노스탤지어가 이 한 곡에 모두 담겨 있다. 이에 대해 임헌정은 “제1번 교향곡은 브람스 인생의 축소판”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1악장에서는 젊은 날의 브람스가 스승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짝사랑하면서 견뎌야 했던 괴로움과 갈등이 느껴집니다. 선율의 기복이 심해요. 격정을 억누를 길이 없는 것이지요. 2악장은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려는 듯합니다. 마치 기도하는 것 같아요. 3악장에서는 초연해집니다. 운명을 받아들이죠. 4악장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20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모든 것을 극복한 듯하죠.”

그는 언제부터 몇 번이나 연주했는지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브람스 교향곡을 자주 연주했지만, 매 연주 때마다 브람스의 궤적을 다시 좇는다. 눈으로 악보를 보고, 귀로 음악을 듣고, 머리로 그의 번뇌를 떠올린다. 직접 두 발로 찾아 나선 적도 있다. “독일 바덴바덴에 있는 브람스하우스에 가봤어요. 브람스가 제1번 교향곡을 완성한 곳이죠. 그곳에 가면 브람스의 데드마스크는 물론이고 그가 곡을 썼던 방과 책상, 피아노도 있습니다. 조그만 창문 밖으로는 ‘블랙 포레스트(Black Forest, 불에 탄 것처럼 검은 빛을 띠는 침엽수림)’가 보이더군요. 브람스도 곡을 쓰다가 종종 그 숲을 바라보곤 했겠죠. 창문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어요. 브람스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작곡 중일 때 손님이 찾아오면 도망가기 일쑤였는데, 창문으로 손님이 들어서는 게 보이면 몰래 정원으로 빠져나갔다고 해요. 그렇게 곡을 쓰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죠. 그리고 음악 안에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비롯해 자신이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녹여낸 겁니다.”

임헌정은 “브람스를 가까이 느낀 뒤 교향곡 스코어를 펼치면 작품이 새롭게 다가온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청중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브람스에 다가가야 할까. “이번처럼 집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아 학구적으로 접해보는 것도 좋지요. 브람스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음반도 미리 들어보면 실제 연주회장에서 ‘부천필이 이 음악을 이렇게 연주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즐거움을 느낄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브람스를 매개로 베토벤, 바흐까지 3B를 모두 만날 수 있다. 브람스는 두 선배 작곡가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음악 곳곳에 단서가 숨어있다. “브람스가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배웠으니 당연하겠죠? 이를 테면 브람스의 제4번 교향곡 4악장은 샤콘느로 작곡됐는데, 이 곡의 주제는 바흐 칸타타 제150번 샤콘느 주제와 유사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1번 교향곡 1악장의 팀파니 소리는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의 운명의 동기를 연상시키죠. 또한 이 세 작곡가의 음악은 서양음악에서 성경과도 같은 존재죠.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새로운 영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임헌정이라 쓰고, 부천필이라 읽다
클래식 팬들에게 ‘마에스트로 임헌정’은 ‘부천필’과 동의어로 인식된다. 그도 그럴 것이 부천필의 23년 역사 중 22년을 함께 하며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임헌정이기 때문이다. 고작 20명 남짓에 불과했던 단원, 오케스트라라 하기도 초라한 부천필이 그에게 덜컥 맡겨진 게 지난 1989년. 시작은 그야말로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것은 우연에 의해 이뤄지죠. 부천필과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당시 부천필은 단원조차 없는 불완전한 상태였지만 오히려 그 점이 제 선택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어요. 단원이 없으니까 직접 뽑으면 되는 거잖아요. 지금은 젊지만 그땐 어렸으니까(웃음), 지휘자로서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당장 유학을 마친 뒤 자리를 못 잡고 있는 연주자들에게 ‘같이 해보자’ 제안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가난한 오케스트라가 좋은 연주를 들려주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도 예산이 넉넉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지독한 박봉에 허름한 연습 환경으로는 단원들에게 최소한의 동기 부여조차 제공하기 어려웠다.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음악적인 성취감과 자부심뿐이었다. 처음부터 전곡 연주를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이던 1991년, 평소 잘 알고 지내는 피아니스트 몇 명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27곡) 연주를 하자고 제안한 게 계기가 됐다. 모차르트 협주곡은 오케스트라 편성이 작아 단원이 부족한 부천필에게도 잘 맞겠다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당시만 해도 국내 오케스트라는 프로그램보다 간판으로 승부하는 시대였고, 그 틈새에서 부천필의 기획력은 단연 돋보였다. 전곡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골수 음악팬들이 삼삼오오 부천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애호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클래식 음악계에 동호회 문화도 태동했다. 자신감을 얻은 임헌정은 국내에서 아무도 도전한 적 없는 말러 전곡 연주를 결심했다. “단원들을 설득했어요. 죽기 전에 우리가 언제 말러 전곡을 연주해보겠냐고, 힘들고 어렵겠지만 도전해볼 만하다고 말이죠.”

그러고는 예술의전당을 찾아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2년간 끈질기게 졸라서’ 결국 예술의전당과 의기투합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말러 시리즈>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음악계에 ‘말러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고, 말러 교향곡에 심취한 일명 ‘말러리안’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부천필은 음악팬들에게 차별화된 이미지로 각인됐다. 지방 오케스트라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전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방 교향악단으로서 제약이 너무 많았어요. 대관과 홍보를 전적으로 예술의전당이 책임졌으니 망정이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연주만으로도 죽을 고생을 했거든요. 정규 단원도 턱없이 부족한데 대편성 오케스트라곡인 말러 교향곡을 연주하려니 어땠겠어요. 제가 지도하는 서울대 기악과 재학생들까지 객원 단원으로 뛸 정도였죠. 리허설 한 번 하는 게 보통 큰 일이 아니었죠.” <말러 시리즈>의 성공 덕분에 클래식 음악계의 판도는 뒤바뀌었다. 국내에 전곡 연주 열풍이 불었고, 클래식 음악 팬층이 탄탄히 다져지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이번 <3B 시리즈>도 <말러 시리즈>의 성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셈이다.

마음으로 브람스를 노래하다
임헌정은 이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부천필과 함께 브람스라는 산에 오른다. 그에게 어떤 브람스를 들려줄 거냐 묻자 “마음으로 노래하는 브람스”라는 답이 돌아왔다. “브람스는 리트(Lied, 낭만파 서정시의 영향을 받아 음악과 시의 이상적인 융합을 추구한 독일 가곡) 작곡가였죠. 교향곡도 마치 리트 같아요. 부천필은 마음으로 노래하듯이 연주할 겁니다.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죠.” 아직도 부천필은 서울의 주요 교향악단과 비교해 재정이나 단원 처우 문제 등 여러모로 열악한 실정이다. 악장을 비롯해 플루트, 첼로 수석도 공석인 상태다. 하지만 그는 자부심이 넘쳤다. 음악적인 응집력은 어느 교향악단보다도 강하다는 확신 덕분이다. “연주에 있어 지휘자와 단원, 단원과 단원 사이의 신뢰는 매우 중요합니다. 소리는 바로 사람이 내는 것이고, 음악의 하모니는 마음의 하모니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마음이 하나로 모였을 때만이 영혼을 울리는, 살아있는 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요. 그게 교향악의 묘미죠. 이런 관계를 이루기까지는 보통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이미 그런 관계가 되었거든요.”

이 시점에서 임헌정과 부천필은 어떤 지도를 그리고 있을까. 그가 펼쳐보인 밑그림은 언뜻 소박해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 “개인적인 목표는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부천필 전용홀을 완성하고 마음 편하게 떠나는 것, 그때까지 남들이 잘 연주하지 않은 좋은 레퍼토리를 발굴해서 들려주는 것뿐입니다. 부천필은 음악 외적인 것에 흔들리거나, 화려한 것을 좇지 않고 언제나 묵묵히 음악의 본질과 씨름할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감격을 못 이겨 터져 나오는 음악으로 청중에게 감동을 전할 것입니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1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