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젤> 안무가
파트리스 바르

"21세기 서울에 19세기 로맨티시즘 바람을 불러 일으키다"


1957년 12세 나이에 파리오페라발레학교에서 무용을 시작해서 3년 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코르 드 발레로 입단, 에투알 무용수(주역)를 거쳐 현재 부예술감독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54년간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살아있는 역사’인 안무가 파트리스 바르가 <지젤>을 위해 한국에 왔다. 2013년 차기 파리오페라발레단장으로도 거론되고 있는 현 파리오페라발레단 부예술감독이자 <지젤>의 안무가인 파트리스 바르를 리허설 중에 만났다.

당신이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했을 때가 세르주 리파가 예술감독으로 있었던 때인가? 어떤 시절이었나?
그는 벌써 그전 예술감독이었고, 미셸 데콩베가 단장이었을 때다. 매우 멋지고 실력 좋은 그랑 에투알들이 있었던 시절이다. 공연 횟수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수요일마다 정기적인 공연이 있었다. 코르 드 발레에 들어가기도 무척 힘들었다. 무용수들의 등급도 현재보다 훨씬 복잡한 7등급로 나뉘어 있었고, 모든 승급을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에 주역무용수가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는 1969년에 프르미에르 당쇠르가 됐는데 그 해에 세르주 리파가 심사위원장이었던 제1회 모스크바 국제 콩쿠르에서 프란체스카 줌보와 함께 듀엣 부문 금메달을 받았다. 이 대회에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솔로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 뒤로 파리에 돌아와 1972년에 에투알 무용수가 됐다.

현재의 파리오페라발레단 명성이 있게끔 한 전설적인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루돌프 누레예프와의 만남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나는 파리오페라발레단뿐 아니라 런던페스티벌발레단(현 잉글리시내셔널발레단)과도 함께 춤을 췄었는데, 그때 루돌프 누레예프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가 로미오를 할 때 나는 머큐쇼를 했었고, 그가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왕자를 출 때 나는 파랑새를 췄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가까워졌고, 그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루돌프가 1984년 파리오페라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왔을 때 나는 이미 무용을 그만두기 시작했을 때라 그가 나에게 단원 연습을 맡겼고, 이후 1986년에는 나를 발레지도위원에 임명했다. 그가 발레단에 있었던 모든 시절에 나는 그의 어시스트로 일했다.

모든 무용수들이 다 안무가가 되지는 않는데, 어떻게 안무를 시작하게 되었나?
사실 춤추는 것을 더 좋아했다. 춤을 출 때 가장 행복했었다고 생각한다. 에투알 무용수로 무대 위에서 공연하며 관객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의 장점은 ‘춤추는 즐거움’에서 드러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후 전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배우고 알고 있는 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발레지도위원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안무를 시작한 것 같다. 나의 첫 프로덕션은 1991년 베를린에서 공연한 <돈키호테>였는데, 이후 <백조의 호수>, <지젤>, <호두까기인형>, <로미오와 줄리엣>, <코펠리아> 등의 클래식 레퍼토리들을 파리오페라발레단과 다른 발레단들을 위해 만들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물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발레단이다. 어떤 점이 350년이라는 세계 최고(最古) 역사의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명성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루돌프 누레예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개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강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발레단에 처음 왔을 때에도 파리오페라발레단은 물론 능력 있는 발레단이었고, 실력 좋은 주역무용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잠자고 있던 시기라 해야 할까. 루돌프가 오면서 조용하던 발레단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마뉘엘 르그리, 로랑 일레르, 실비 길렘, 이자벨 게랭 같은 젊은 새 주역을 발탁했고,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 속의 미녀>만 있던 발레단에 새 레퍼토리들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발레단의 내재적 욕구가 그를 통해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잠들어 있던 무용수 그룹을 이끌었고,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돌프와 함께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든가 아니면 그냥 있던 자리에 머물러 있든가. 그 뒤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예술적 역량이 만개했다. 세르주 리파 시절 이후로는 가지 않았던 미국 투어를 다시 시작했고, 그야말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재발견’의 시대였다.

이번에 국립발레단이 당신의 <지젤>을 공연하는데 국립발레단 무용수들과 처음 리허설을 해본 느낌은 어땠나?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은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한다. 무용수들이 춤에 대한 진실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솔리스트들도 훌륭하고, 각각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는 것이 내겐 흥미로운 점이다. 새로운 컴퍼니를 만나서 그들의 재능을 발견하는 재미가 크다. 그 새로운 발견에 대한 매력에 항상 끌린다. 다른 발레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비슷한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를 공연해보면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무용수들의 신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각자의 자아와 심성에 따라 굉장히 다른 작품이 나온다.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에게서는 그들만의 <지젤>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작품의 시작이니 더 많이 그들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3주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말이다.

낭만주의 발레의 탄생지인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지젤>을 올리는 것이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지젤>의 재안무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지젤>은 1841년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세계 초연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후 <지젤>이 각기 다른 나라, 각기 다른 발레학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왔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자기 방식대로 그들의 신체와 기질을 가지고 러시아화했듯이 말이다. 이 버전은 1991년에 <지젤> 세계 초연 150주년을 기념해 외젠 폴리아코프와 같이 재안무해 올렸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특히 역사상 중요한 시기였고, 감정이 풍부했던 낭만주의 시대 예술에 대한 찬미의 정신을 현재화시켜 살려내기에 <지젤>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른 시대의 예술을 무작위적으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한 예술작품의 에센스를 현대화하는 것이다. 현재 방식으로 다시 옛 작품을 살려내는 것, 시대의 주조에 집어넣어 재현하거나 움직이는 방법을 현대적으로 창조해내지 않으면 그냥 박물관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과 함께 그것을 우리 방식으로 살려내는 것 사이의 균형을 존중하고자 했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11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