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월정통연극 ⅩⅡ <벚꽃동산>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연출가 지차트콥스키


어느 해라고 우리 연극 무대에 체홉 작품이 오르지 않은 때가 있으랴마는, 체홉 탄생 150주년이자 한·러 수교 2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굵직하고 다채로운 체홉 공연들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무대가 바로 5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오르는 토월정통연극 ⅩⅡ <벚꽃동산>이다.

지난 2004년 <갈매기>를 통해 토월극장 무대를 깊은 울림으로 채웠던 연출가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와 무대 디자이너 에밀 카펠류쉬가 다시 한국을 찾았다. 시적이면서도 압도적인 이미지를 구현했던 에밀 카펠류쉬의 무대와 인물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간 지차트콥스키의 섬세한 시선, 그리고 중견 배우들의 원숙한 연기가 어우러졌던 <갈매기>는 초연 당시부터 관객과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후로도 오래도록 회자되었던 호연이었다. 이번에 이들이 준비하고 있는 무대는 체홉의 4대 희곡 중 마지막 작품인 <벚꽃동산>.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만난 연출가 지차트콥스키는 연출 의도나 무대 콘셉트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워하며 말을 아꼈지만, 등장인물 모두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삶과 내면에 접근하고 있었고, 이를 무대 위에 함께 구축해나갈 배우들에 대해서도 단단한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번 공연이 처음으로 연출하는 <벚꽃동산>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신이 최초로 이 작품을 접했을 때(희곡이든 공연이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희곡을 읽었는데, 솔직히 처음 읽었을 때는 어떤 느낌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스토리를 읽은 것이 아니라 무슨 신문을 읽은 듯한 기분이었고 작품에 대해서도 조금밖에 이해를 못했습니다. 후에 무대에 오른 연극을 봤는데,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게 많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책을 읽었습니다. 그 뒤로는 희곡을 여러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것을 알고 나서 다시 읽으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읽혀지고,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계속 발견해나갔습니다. 좋은 극작가는 언제나 작품을 통해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사람을 더 많이 만나고 대화하면서 그들을 더 이해하게 되면 그만큼 작품에서도 많은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죠. 이번에 배우들과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제가 읽어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찾게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벚꽃동산>이 체홉의 다른 세 편의 희곡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제게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네 작품 모두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체홉적인 스타일, 체홉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네 작품 모두에 들어가 있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가 이 작품들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아픔과 나약함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고요. 100여 년 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닌 아픔이나 나약함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기에 언제나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연출가로서 <벚꽃동산>의 어떤 점에 가장 매력을 느낍니까?
물론 등장인물들이지요. 체홉의 모든 인물들이 그렇긴 하지만, <벚꽃동산>의 인물들은 정말 매력적이에요. 보이는 것 이상으로 풍부한 내면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들 한명 한명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작업입니다. 그리고 <벚꽃동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의 계층이 아니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귀족인 라넵스까야와 새로 등장한 상인 계급인 로빠힌, 대학생인 빼쨔와 하인인 야샤 등 여기에는 각기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이들은 살아가는 방식도 전혀 다르고, 삶의 가치도 같지 않으며, 좋고 나쁜 것의 기준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때문에 각각의 사람들이 서로 필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희극적인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 지점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벚꽃동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작품의 주요 인물인 라넵스까야와 로빠힌뿐만 아니라 샤를로따나 야샤, 피르스 같은 작은 역할들도 대사를 주의 깊게 읽다 보면 그들의 삶과 역사가 보입니다. 때문에 대사량이나 등장 시간과 관계없이 제게는 이들 모두가 한 인물로서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연출가로서 확신하는 것은 체홉이 등장인물 각각의 대사 안에 모든 것을 다 집어넣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말을 천천히,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어떤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점점 저도 모르게 그 사람 말을 믿게 되고 공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해 안 되는 말이라 할지라도 가까이 다가가서 읽으면 왜 그가 그런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하는지 받아들이게 되면서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됩니다. 저는 이 작품의 모든 인물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극중 ‘벚꽃동산’은 작품의 배경일 뿐 아니라 또 하나의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공간입니다. 에밀 카펠류쉬의 상징적인 무대는 언제나 관객을 기대하게 만드는데요, 이번 무대의 콘셉트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은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지금 어떤 콘셉트인지 미리 말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벚꽃동산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건 벚나무나 동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주의 깊게 읽어보면 작품 안에서 어떤 인물도 벚꽃동산 안에서 만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들 집안에서 벚꽃동산에 대해 이야기만 하지, 실제로 그 안에서 만나거나 산책하는 사람은 없어요. 참 이상한 상황입니다. 이는 아마 체홉이 이야기하려는 게 벚나무나 동산 자체가 아니란 걸 의미하겠죠. 중요한 건 벚꽃동산이 아니라 인물들이 그것에 대해 어떤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입니다. 라넵스까야와 가예프가 벚꽃동산을 파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것은 단지 벚나무가 아깝고 그 동산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추억과 기억을 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벚꽃동산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 아름다웠던 삶, 젊음 그 자체를 상징하므로 이를 보존하고 싶은 것이죠. 때문에 그들은 합리적인 비즈니스맨 로빠힌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로빠힌이 바라보는 것은 벚나무 자체, 벚꽃동산의 현실적인 가치니까요. 벚꽃동산을 바라보는 이 시선의 차이가 가장 근본적인 그들 사이의 대립을 만들어냅니다. 누군가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가치로서 소유물을 지키고자 하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젊음 혹은 삶으로 바라보면서 지켜내고자 하는 대립, 이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습니까. 웃음이 절로 나오지 않나요?

이번에 캐스팅된 배우들을 보니, 연극 무대에 오래 선 배우들도 있고 TV나 드라마에서 자주 만난 배우들도 있습니다. 배우들의 오디션과 캐스팅 과정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어떤 점이었습니까?
언제나 그렇듯이 배우를 선택하는 것은 모험입니다. 그냥 느낌이 있고, 이 사람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배우들을 선택했습니다. 배우들의 프로필이며 그간의 경력을 정리한 자료들을 받아보았지만, 사실 읽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느낌, 그 배우가 지닌 느낌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습니다.

2004년 한국 배우들과 토월무대에 올렸던 <갈매기>는 관객과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후 다시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는 그 공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 그 공연이 어땠고, 무대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저 기억나는 건 어떤 느낌, 작업하고 무대에 오른 공연을 보면서 느꼈던 만족감 정도인데… 아마 <갈매기>를 지금 다시 올린다면 예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연출할 것 같습니다. 그때도 분명 많이 고민하고 찾았겠지만 지금 그 작품을 다시 본다면 또 새로운 것들이 보일 테니까요.

지금 <벚꽃동산>을 연습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현재 배우들과 같이 대본을 읽으면서 원본과 번역된 대본 사이 미묘하게 다른 부분들을 찾아내고, 인물의 대사를 이해해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아직 세 번밖에 못 하긴 했지만 리허설마다 새로운 것들이 읽혀지고 있는데, 이건 정말 좋은 징조입니다. 배우들 모두 이 작품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예전에 읽어내지 못한 것들을 새로이 알아가고 있고 이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리허설을 할 때마다 배우들과 서로 이야기하는 과정 속에서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 깨닫게 되고, 그것들이 매번 저를 흥분시킵니다. 그건 이 배우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들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고 제게는 그런 것들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외래어맞춤법이 아닌 연출가가 의도한 대본상의 표기를 따랐습니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1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