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갈매기>의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
"지금까지 보아온 <갈매기>는 잊어라"


<레이디 맥베스>에 이어 예술의전당 최고의 연극 시리즈 두 번째 주인공으로 토월극장 무대에 오르는 <갈매기>는 지금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새로운 느낌, 새로운 감각으로 찾아 올 <갈매기>를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와 배우들을 통해 미리 만나 본다.

체호프의 <갈매기>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달빛 가득한 호숫가, 더없이 순수한 모습으로 뛰어 들어오는 니나, 불안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무대를 왔다 갔다 하는 트레플례프, 검은 상복을 입고 우울한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는 마샤, 수첩을 꺼내들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트리고린 등... 오랜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무대 위에서 이들이 그려온 어둡고 축축한 호숫가 정경은 마치 <갈매기> 공연의 모범답안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왔다.

"체호프는 박물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모습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는 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는 체호프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체호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 곳곳에서 살아 숨 쉬는 체호프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2008년, 한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배우들이 만들어가는 체호프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동시대의 관객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일단 원작의 대사들을 배우들이 말하고 관객들이 알아듣기 편한 구어체,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로 바꾸었다. 또한 주요 모티브를 이끌어가는 대사들의 골격만 남긴 채 구구절절 이어지는 말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덕분에 작품의 핵심 모티브는 더욱 선명해지고 대사의 빈 공간을 연기로 채워야 하는 배우들의 해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우리 시대의 <갈매기>를 위하여
체호프의 작품에서는 중대한 사건들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과 심리, 인물 간의 관계가 극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갈매기> 역시 사건보다는 인물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인물간의 관계가 특히 복잡한 것으로 손꼽힌다. 때문에 이 작품에는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주인공이 없다.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무대 위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주역들이다. 배우든 작가든 배우나 작가를 동경하는 사람이든 결혼을 꿈꾸는 사람이든 이들은 모두 '무언가를 원했던' 사람들이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하고, 여배우를 꿈꾸었던 희망은 고난으로 바뀐다. 사랑받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하고, 행복해지길 바라지만 결국 불행해진다. 제각기 자신의 십자가를 하나씩 지고 버거운 삶을 살아나가는 이들의 고통스런 삶은 그 경중을 가리기 어려우며 그 자체로 하나의 세상을 이루고 있다. 당연히 무대 위에서 이들을 연기하는 배우들 한명 한명의 든든한 해석이 받쳐주지 않으면 무대에 펼쳐진 세상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갈매기> 공연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는 배우들의 해석과 앙상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호성, 남명렬, 김소희, 김경익, 정재은, 김태우, 정수영 등 이번에 유리 부투소프와 <갈매기>를 만들어가는 배우들의 이름은 일단 기대를 걸기에 충분하다. <갈매기>를 처음 접하는 배우도 있고 이미 다른 연출, 다른 역할로 <갈매기> 무대에 오른 배우가 있는가 하면 부투소프와 다른 작품에서 만난 배우도 있었지만 연습장에서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들뜬 목소리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갈매기, 그리고 살아있는 체호프"를 만들어가는 설렘과 흥분을 전했다. 매일 이어지는 강행군에 슬슬 지칠 만도 했지만 연출과 배우 모두 밥 먹는 시간을 아껴가면서 새로운 인물을 찾아내 표현하는 데 몰두해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제 토월극장 무대에 서게 될 인물들은 우리가 지금껏 알아온 <갈매기>의 주인공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더 이상 니나는 순진하기만 한 소녀가 아니고, 마샤도 검은 치맛자락을 끌고 다니는 청승맞은 여인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뇌하는 트레플례프도, 유약한 글쟁이 트리고린도 이 무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래된 사진처럼 마음속에 각인되어 온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이들의 등장에 순간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공연장을 나설 때면 눈앞에 있는 이들이 체호프 희곡집 속에 갇혀있는 '박제 갈매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고민을 나누는, 생생히 살아있는 인물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대에 읽은 '갈매기'와 30대에 읽은 '갈매기', 그리고 더 나이가 들어서 읽는 '갈매기'는 모두 느낌이 다르다. 읽을 때마다 마치 다른 작품을 만난 것처럼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 체호프의 매력이고 진정한 힘이다. 인생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삶의 색깔과 숨결이 매 순간 달라지듯이 체호프의 작품 역시 시대에 따라 다른 시선,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체호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면을 지닌 작가다. 고정관념이나 정형화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그의 작품을 만난다면 우리는 보다 풍요로운 체호프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2008년 가을, 토월극장 무대에 오르는 부투소프의 <갈매기>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놀라운 순간들을 선사해줄 것이다.

체호프는 박물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이 당신이 연출하는 최초의 <갈매기>라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보이체크>, <햄릿> 등 많은 고전을 연출해왔는데, 러시아 연극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갈매기>를 작업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스스로 체호프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덜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무에도 때가 되어야 열매가 열리듯이 모든 것에는 제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지금이 체호프를 할 수 있는 시기인 것 같고 그래서 지금 <갈매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에서 <갈매기>가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갈매기>는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희곡입니다. 배우, 작가, 그리고 배우를 꿈꾸는 사람과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이들의 실현되지 못한 꿈이 이 작품의 주된 모티브인데 이런 것들이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는 <갈매기>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와 닿는 모티브 중 하나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번에는 이것을 주된 테마로 가져가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갈매기> 공연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체호프와 <갈매기>란 작품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들 때문에 새로운 인상을 받지 못하곤 합니다. 작품을 만들 때도 틀에 박힌 역할 분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체호프를 제대로 만나기 어렵지요. 저는 체호프와의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의 일상, 그리고 그 일상과의 교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체호프를 만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이야깃거리, 대화를 찾아야하고 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 이야기하듯 우리가 체호프를 무대에 올리는 게 아니라 체호프가 우리를 무대에 올리는 것입니다."

각색한 대본을 보니 대사가 아주 간략하고 명료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이 시대에 맞는 말과 형태로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이 이 작품의 본질적인 의미들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대본이 간략해진 것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들, 나에게 중요한 테마를 위주로 각색 작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중심적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핵심 모티브를 축으로 두고, 이러한 모티브가 아닐 경우에는 과감하게 잘라내거나 줄였습니다."

거의 모든 배우들을 인터뷰와 오디션을 통해 직접 선발했는데 캐스팅 과정에서 어떤 점에 중점을 두었습니까?
"직감입니다. 조금씩 다르지만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바로 와 닿은 배우도 있었고 어떤 배우는 더 깊이 알아보기 위해 몇 번 더 만나기도 했습니다."

오디션과 연습을 통해 만난 한국 배우들에게서는 어떤 느낌을 받았고 연습 과정에서 어떤 점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배우들 모두가 전반적으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다만 많은 배우들이 주어진 대사와 배역에 있어 종종 어떤 행동 모델을 따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배우들이 내면적으로 좀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고 자기 자신과 현대의 문제들에 대해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극중 트레플례프가 부르짖었던 '새로운 형식'에 대해 같은 연극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트레플례프가 이야기한 '새로운 형식'이라는 것은 곧이 곧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변화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정말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는지 흥미로운 뭔가를 발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충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세대 간의 충돌일 수도 있고 이는 예로부터 인간의 삶 속에 계속 존재해 왔던 것입니다."

연습을 보니 전반적인 분위기가 심각하고 무겁기보다는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체호프는 아주 유쾌하고 가벼움을 아는 사람입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래서 체호프의 대사들을 그런 관점에서부터 발견해나가려고 합니다. 공연에서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런 가벼움이겠지만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대사들 속에서 어떻게 깊은 인간 내면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가, 지금 그것을 작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작품들은 늘 강렬한 무대 이미지로 깊은 인상을 남겨왔습니다. 이번 <갈매기> 무대의 콘셉트는 무엇입니까?
"파국 이후의 세계를 콘셉트로 잡고 있습니다. 파국의 시간, 재앙의 시간 속에 있는 세계를 무대 위에 세우고자 합니다. 그런 파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극장이고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전체적인 큰 의미와 상징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 그 맥락 안에서 디테일한 장치들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08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