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의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
"시대와 체제를 넘어, 예술은 전진한다"


188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관현악단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은 18세기 중반 무렵 형성되었다. 현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문화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매우 민감한 도시였다. 표트르 대제 이후에는 프랑스, 독일, 폴란드 등 지척의 경쟁국들이 피운 화려한 예술의 꽃냄새를 시샘하고 부러워할 만큼 여유도 생겼다. 오케스트라는 무엇보다 왕실의 권위를 좌우하는 상징적인 단체였다. 표트르 대제 이후 예카테리나 2세에게도 서유럽 왕실과 같은 관현악단이 필요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이 개교한 1862년 이후 오케스트라는 안정적으로 단원들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예카테리나 여제가 꿈꾸던 황실 전속 관현악단은 결국 그녀가 죽은 다음인 1882년에야 창단되었다. 클래식 음악에 관한 한 서유럽에 비해 상당히 쳐져 있었던 러시아는 스스로 악단을 이끌 인재가 부재했다. 첫 상임지휘자는 독일의 헤르만 플리게였다. 그의 후임으로 후고 바를리흐가 지휘봉을 잡은 다음에도 아르투르 니키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독일의 소문난 거장들이 객원으로 자주 초청되어 악단을 훈육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지원과 장려의 결과로 러시아 재정이 붕괴되기 일보 직전 즈음 황실 전속 오케스트라는 이미 서유럽의 여타 궁정악단과 비교할 때 규모 면에서나 실력 면에서 훨씬 높은 수준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실은 시대의 진보 앞에 국가를 지킬 능력이 없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황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는 그대로 잔존했다. 예술은 사회주의 정권에도 필요한 강력한 홍보 매체였던 것이다.

1924년,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정권은 지휘봉을 콘트라베이스 주자 출신의 지휘자 쿠세비츠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쿠세비츠키는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예술가였다. 결국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쿠세비츠키는 지휘봉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후임으로 발탁된 알렉산드로 헤신 또한 임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임했고 그 뒤를 이은 에밀 쿠페르도 1923년 사임하고 서방으로 망명했다. 음악계의 1차 엑소더스는 이렇게 줄을 이었다. 그 사이 오케스트라는 상주 도시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계속 명칭이 함께 바뀌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페트로그라드로, 그리고 다시 1924년 레닌그라드 국립 필하모닉 아카데미 교향악단(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으로 바뀐 이름은 이후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알렉산드르 가우크가 상임으로 취임하면서 회복기미를 보이던 오케스트라는 그러나 가우크의 후임으로 포디엄에 오른 프리츠 슈티드리의 미국망명으로 다시 세차게 흔들렸다.

명망 있는 거장들의 잇단 망명에 러시아 문부성은 긴장했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를 경험한 노장보다는 사회주의 신념이 강한 젊은 예술가를 수소문했다. 소비에트 국립 교향악단의 상임으로 옮겨간 가우크는 자신의 제자인 예프게니 므라빈스키를 천거했다. 당시 마린스키 오페라극장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던 므라빈스키는 이즈음 처음 개최된 소비에트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전도유망한 35세의 신인 지휘자였다. 마침내 그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상임으로 취임했다. 비로소 이 악단의 황금시대는 시작되었으며, 그 시대는 무려 반세기나 이어졌다. 므라빈스키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그는 20세기를 풍미했던 독재자형 지휘자 바로 그 전형이었다. 그와 더불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 최정상급의 악단으로 단숨에 도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시적으로 찾아온 해빙무드를 이용해 1956년 므라빈스키는 처음으로 서방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그들의 순회공연은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차 부대가 짓밟고 간 것보다도 더 파격적인 흔적을 남겼다. 므라빈스키의 음악 앞에 정치와 사상은 무력했다. 1988년 50년의 장기 집권 끝에 므라빈스키는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면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므라빈스키 사후, 단원들은 유례없는 지휘자 추천 투표를 실시했다. 그리고 모두의 만장일치로 거론된 단 한 명의 지휘자에게 지휘봉을 넘겨주었다. 그는 유리 테미르카노프였다.

1991년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당시 마린스키 오페라극장의 예술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유리 테미르카노프에게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꿈의 악단이었다. 명장이 갈고 닦은 명기를 물려받은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음악인생은 그러나 절대로 순탄하지 않았다. 악단은 다시 한번 정치의 거센 회오리 폭풍에 휘말렸다. 페레스트로이카는 1991년 소비에트 붕괴로 이어졌다. 막힌 둑이 터지듯, 곤궁한 생활에 질려 있던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앞을 다투어 서방으로 떠났다. 2차 엑소더스의 시작이었다.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대거 빠지면서 악단의 연주력은 뿌리째 흔들렸다. 악기나 다름없는 악단이 부실해지자 실력 있는 지휘자들은 저마다 다른 삶의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테미르카노프는 남았다. 다시 이름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으로 바뀐 자신의 악단을 자신만의 카리스마로 다독였다. 서방으로 망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머니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내게는 국가가 그러했다." 결국 테미르카노프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은 부활에 성공했다. RCA 등 해외 굴지의 레이블에 자신들의 레코딩을 선보이며 그들은 건재함을 과시했다. 테미르카노프는 므라빈스키만큼 치밀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훨씬 뜨거운, 또 다른 색깔의 카리스마를 악단에 심어 놓았다. 그것은 휴머니즘에 가까웠다.

2001년 서울
테미르카노프 시대 이후 이 악단은 처음에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이라는 이름으로, 나중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도 몇 번 순회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막역한 인연의 계기는 2001년 결정적으로 찾아왔다. 당시 예술의전당에서 공연 중이던 런던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가 이틀 공연 중 첫 날을 마치고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내한 당시부터 신장병으로 인해 상태가 좋지 못했던 거장에게 서울대 병원은 더 이상의 지휘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내렸고 그의 부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예술의전당은 나머지 공연을 취소하는 대신 마주어를 대표할 만한 거장급 지휘자를 하루 만에 데려오기 위해 아시아권에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레이더망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과 함께 일본을 순회공연 중이던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포착되었다. 마침 테미르카노프는 순회 일정 중 딱 하루를 휴식으로 비워두고 있었다. 소식을 접한 테미르카노프는 단 하루의 휴식을 포기하고 가방 하나 없이 빈 몸으로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탔다(그의 가방은 다음 순회공연 도시에 먼저 부쳐졌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서울에서는 급행 비자와 그가 제안하여 바뀐 곡목의 악보, 그를 위한 턱시도, 그리고 구두까지 챙겨 준비해야 했다. 이 모든 준비가 자정부터 다음 날 아침 7시 사이에 완성되었다. 사상초유의 대타 지휘자로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게 된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런던 필하모닉과의 연주는 한국 공연계 사상 유래 없을 정도의 명연 중 하나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 때 테미르카노프가 선택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은 청중들의 뇌리에 아직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2008년, 서울
대타 사건(?) 이후, 예술의전당은 몇 차례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과 테미르카노프를 초청했다. 처음에는 그 초청이 테미르카노프의 헌신에 대한 화답(?)의 의미였지만, 그들은 매번 한국을 찾아올 때마다 차원이 다른 러시아 레퍼토리를 우리에게 선사하며 스스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2006년 테미르카노프의 지휘로 들을 수 있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러시아 악단만이 연주할 수 있는 최고의 명연이자 사운드의 절정이었다. 이번 내한공연을 위해 테미르카노프는 이틀 간에 걸쳐 'All Tchaikovsky Program'을 마련했다. 특히 첫 날 <예프게니 오네긴>, <오를레앙의 처녀>, <스페이드의 여왕>으로 이어지는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레퍼토리는 국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멋진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순회공연에 테너 앤드류 굿윈, 소프라노 예카테리나 셰바첸코 등 러시아 레퍼토리 전문 성악가를 대동할 예정이다. 이밖에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이 작곡가의 지휘로 직접 초연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이라든가, 모처럼 무대에 나서는 조영창 협연의 로코코 변주곡, 신들린 비르투오소 데니스 마추예프 협연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이 이번 공연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소리를 내기는 쉽다, 하지만 채우기는 어렵다

오는 11월 12일과 13일 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에게도 또 하나 기념할 숫자가 있으니, 바로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70세 생일이다. 고향 요리와 그 맛이 비슷하다며 지난 2001년 런던 필하모닉 공연 이후 한식 마니아가 되어버린 그와의 서면 인터뷰는 그의 단호한 성격 그대로 짧지만 절도가 넘쳤다.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어 반갑다. 한국을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되었는데, 한국 청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이 살고 있는 멋진 나라는 매번 방문할 때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한국 청중은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청중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들에게 우리의 음악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커다란 기쁨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매번 내한공연 때마다 다양한 러시아 음악을 묘사하여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오페라 레퍼토리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한국을 포함한 이번 아시아 순회공연을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해 달라. 왜 이런 프로그램을 선택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아시아를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 페스티벌'이다. 별다른 특별한 의도는 아니지만, 차이코프스키라는 작곡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교향곡, 오페라, 관현악 장르 모두를 말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뿐 아니라 우리 도시와도 인연이 깊은 작곡가이다. 므라빈스키 또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듣고 처음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꿈을 키웠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인생의 위대한 절정기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으며 그는 아직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문화적 상징이다."

21세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세계 메이저 오케스트라에서는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레퍼토리라든가 악기, 사운드가 모두 바뀌고 있는 시점인데,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은 어떠한가? 당신은 이러한 변화를 시도해 본 적이 있는가? 오늘날 이러한 변화가 필연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아무런 변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작곡가의 생각을 최대한 정확하게 콘서트를 듣고 있는 청중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들에게 이런 저런 작품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기원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그러한 사명은 변할 수 없다."

오는 12월, 일흔 살이 된다. 일상이나 음악생활에 있어 젊은 시절과 비교해서 변화한 점이 있는가?
"없다. 아무런 특별한 변화를 겪지 않았고 또 선택하지도 않았다. 시대가 변하고 나라는 체제가 바뀌었지만 나는 늘 한 자리에 머물렀고 다만 내 일을 계속해서 해 나갈 뿐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의 악단을 이끌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지휘를 하고 콘서트 여행을 다닐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항상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작곡가의 생각에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작곡가가 그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동안 그 안에 심어 두었을 그의 사상과 느낌을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물론, 소리를 내기는 쉽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채우기란 매우 어렵다."

요즘 젊은 음악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에게 만족이나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위대한 젊은 음악가들을 굉장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어느 측면에서도 예전 세대에 비해 굴할 것이 없다."

한국에서의 경험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언제의 무엇이었는가?
"무엇보다 단기간에 이룩한 위대한 경제적 진보를 꼽을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요리다. 나는 한국의 요리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그 음식들은 정말 놀랍다. 이번에도 서울에 가면 기쁜 마음으로 한식 레스토랑을 찾아갈 예정이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08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