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ife, My Music!>의 피아니스트 박은희
그리고 한국페스티발앙상블


새벽 5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눈을 떠 마당에 있는 조그만 텃밭에 물을 주고 난 뒤에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8시면 역삼동 한국페스티발앙상블 사무실에 출근해 매달 열리는 여러 차례의 연주회 프로그램을 정한다. 점심 때는 드라마 음악회의 식구들인 연극인들과 미팅을 하고, 오후에는 여의도 연습실에 가서 단원들의 연습을 지켜본다. 곧 종종걸음으로 저녁에 있을 특별 콘서트의 사회자로 나서기 위해 미용실을 찾아야 한다.

여느 음악인과는 사뭇 다른 일상이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사이도 없었다. 그저 음악을 전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그 자리에서 늘 앞에 서 왔다. 언뜻 보면 차가운 인상이지만 마음 속 음악에 대한 열정은 너무 뜨거워 계속해서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야만 잠을 이룰 수 있다는 박은희. 드디어 그녀가 너무도 바쁘게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예술의전당이 기획하고 있는 한국의 아티스트 시리즈 <My Life, My Music!>의 가을 무대에 주인공으로 나서기 때문이다. 평소 남다른 기획력으로 소문난 그녀는 이제까지의 무대와는 또 다른 개성을 보여주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우선 두 차례 있을 공연의 제목을 정했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자신에게 운명처럼 다가와 평생을 연인처럼 함께 해 온 음악을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겠다는 의미에서 붙여 본 제목이다. 먼저 10월 18일(토) 공연에서는 박은희의 음악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무대에는 박은희와 피아노, 그리고 그녀의 분신이 등장해 그녀의 일기장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펼쳐 보인다. 첫 곡은 박은희 음악인생의 첫 발자국과도 같은 곡으로 선곡했다.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임원식 선생의 지휘로 KBS교향악단과 협연한 무대에서 연주했던 곡으로 자신의 무대 데뷔곡이었던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 D장조'다. 이번 무대에서는 그녀의 오랜 음악친구들이 함께 한다. 다음은 그녀와 사춘기 열병을 함께 앓으며 고민하고 사랑했던 베토벤의 소나타들로 꾸며진다. "그 시절엔 왜 그렇게 베토벤이 좋았는지 몰라. 내 뜻대로 연주되지 않아 날 무척 애 먹이곤 했지만 싸우다 정든다고 내 10대는 베토벤과 함께 했어." 그래서일까 그녀는 '나의 베토벤에 대한 단상'이란 타이틀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을 2악장의 아다지오 부분을 중심으로 메들리로 들려줄 생각이다. 계속해서 그녀가 30대에 애정을 가지고 연주했던 현대곡들을 대표해 1985년 백병동 선생이 작곡한 '소나테, 소노르', 슈만의 '어린이 전경'과 바흐의 곡들이 연주된다. 특히 바흐는 박은희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힘들고 어려워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싶을 때 그녀의 가슴을 울린 음악이다. 세월에 따라 달라진 박은희 음악세계를 총정리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11월 15일(토)에 있을 두 번째 공연에서는 박은희의 음악 동반자 '한국페스티발앙상블'이 함께 한다. 현악기와 관악기, 그리고 성악에 이르기까지 한국페스티발앙상블의 폭넓은 레퍼토리를 확인할 수 있는 무대가 예상된다. 연주곡들을 살펴보면 슈베르트의 '피아노 연탄을 위한 환상곡', 마르티누의 '주방장의 음미', 그리고 강은수의 창작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와 비올라, 클라리넷을 위한 3중주', '영원한 비틀즈' 등이 멋진 화음에 실려 연주될 예정이다. 시대를 넘나들고, 기악과 성악이 어우러지는 무대. 실내악의 매력을 맘껏 자랑할 수 있는 곡들로 짜여졌다는 느낌이다. 어디 연주뿐이겠는가. 한국페스티발앙상블 단원들은 이번 무대를 통해 자신들의 리더 박은희와 함께한 속 깊은 이야기들도 들려준다고 한다. "누구는 무대에 오르면 앞이 깜깜하다고도 하고,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연주에만 충실한다고 하는데, 난 좀 달라. 무대에 오르면 우선 눈을 크게 뜨고 관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지. 그리고 '오늘은 이들에게 어떤 음악세계를 전달해야 하나'하고 짧게나마 고민을 해. 그런 다음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해. 몸과 마음을 다해서."

누구보다 관객을 사랑하고 관객에게 최선을 다하고픈 박은희, 그리고 한국페스티발앙상블. 그들은 분명 가을 무대의 멋진 주인공이 될 거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보내는 음악

"어머, 최선생 여기야, 여기."

"왜 여기 계세요! 햇볕이 뜨거운데, 카페 안에서 기다리시죠."

"왜? 좋지 않아? 난 바람이 있고 햇빛도 있어 좋은데. 아이들 웃음소리도 있고. 아, 좋다. 그래도 인터뷰를 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겠지."

그래, 역시 박은희답다. 태양을 피하는 것이 대세인 요즘, 솔직히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햇빛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박은희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난 세월 해온 음악 활동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감히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혁명가라 할 수 있는 박은희. 생각은 자유롭고 행동은 도전적이었다. 그녀가 시작한 모든 일들은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처녀지였다. 유학 후 본격적인 솔리스트 활동을 할 때 박은희는 이미 아이가 둘이나 있는 주부였다. 당시에 그건 파격이었고 그녀가 앞으로 벌일 일들의 서곡이었다. 독주회에서 한국 작곡가에게 작품을 위촉해 초연하는 일, 현은 기본이고 관악기에 성악까지 포함한 실내악단을 만들어 정기연주회를 여는 일 또한 국내 음악계에는 흔치 않던 일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청소년 관객들을 위해 무대에서 해설을 하고, 방송에서 클래식 전문 DJ를 하는 일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바로 그런 일들을 해왔기 때문에 예술의전당이 야심차게 벌이고 있는 <My Life, My Music!>의 최연소 주인공이 된 거라 여겨졌다.

음악회 준비로 바쁘시죠?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 앞에 있는 시간은 정말 행복한 순간이죠. 그래서 요즘 무척 행복해요. 독주회라니... 아마 10년 만에 갖는 독주회일 거예요. 정말 오랜만인데 그래서 더욱 긴장되고 약간은 들떠서 연습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나 연습은 좋지만 힘들기도 해요. 하루는 연습이 뜻대로 되지 않아 머리도 식힐 겸 옛 물건을 정리하다가 오래전 메모 한 장을 발견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제목은 '피아노를 그리며'. 어때요? 그럴 듯 하죠. '하루 종일 피아노 치면 뭘 해/어차피 그 가락 그 노래지/아니 아니야 그건 아니야/피아노를 칠 때면 마음이 다 날아가/하루 종일 피아노를 쳐 보았지만/실력이 늘지를 않는데/포기를 해버릴까/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피아노를 치면 마음이 다 날아가' 아마 중학생 때인 것 같은데 콩쿠르 준비한다고 하루에 7, 8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할 때였어요. 어린 나이에 힘들었겠죠. 마음은 창문 밖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은데 피아노 연습은 해야 하겠고 그래도 어린 마음에 음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네요. 이번 무대에선 음악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 내 모습까지를 솔직히 전해드릴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 스승들이 계셨을 거 같은데요?
"그럼요. 너무도 많은 분들의 가르침이 있어서 오늘의 제가 있는 거죠. 먼저 작고하신 임원식 선생님이 생각나네요. 첫 협연무대에서 지휘를 해 주셨어요. 미국 유학 후 솔리스트로 잘 지내다가 실내악단을 창단하고 방송을 한다고 바삐 다니는 것을 못내 아쉬워 하셨습니다. '은희는 무인도로 데려다 놓아야겠어. 그래야 연습하고 연주만 하지'라고 꾸짖기도 하셨어요. 저를 피아니스트로 만들어 주신 정진우 선생님도, 그리고 한국페스티발앙상블을 창단하고 20년 역사를 이룰 수 있게 앞에서 이끌어 주신 이강숙 선생님도 큰 스승님이시죠."

누구보다도 현대음악에 대한 애정이 큰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곡들을 많이 연주하시고 기획하셨는데, 솔직히 관객들은 낯설 수도 있지 않나요.
"어디 관객뿐인가요. 연주자들도 새로운 악보를 주고 연주하라고 하면 무척 난감할 때가 많아요. 하지만 그것은 오늘을 사는 음악가의 당연한 몫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 무척 아름다운 일이잖아요. 예를 들어 패션쇼를 생각해 봐요. 세계 패션계를 이끌어 가는 디자이너들은 시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한 의상들을 소개하죠. 그럼 모두들 당혹해 하면서도 어느새 그 아이디어는 트렌드화되고 큰 유행을 일으킵니다. 현대음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처음엔 낯설지만 그걸 친근한 음악으로 만드는 것은 연주가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베토벤이나 리스트도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거든요."

한국페스티발앙상블이 벌써 22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한 단체를 이끈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되는데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해 볼만한 일이었죠. 일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몇 가지 다짐을 하면서 한국페스티발앙상블을 이끌고 있어요. '웃으면 된다'와 '그럴 수도 있지'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악기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연주자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연주생활을 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에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몇 년 주기로 찾아 왔지만 그럴 때마다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다짐들 덕분이었어요."

클래식 음악을 전하는 일에 늘 앞장섰던 분인데, 앞으로 가장 힘쓰고 싶은 분야는요?
"클래식 음악을 보다 친근하게 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제가 예술의전당과 함께 했던 청소년음악회도 그런 일 중 하나였고 요즘 한창 정성을 쏟고 있는 드라마 음악회도 바로 음악을 쉽게 전하려는 일이죠."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그녀가 카페 앞 테라스로 나서자 어느새 팬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어머 박은희씨 아니세요? 지난 번 미술관 음악회 잘 보았어요. 다음 연주회 때 뵐께요." 멀리서 그저 바라만 보는 스타가 아닌, 친근하게 다가와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스타. 박은희, 그녀는 분명 클래식 음악계의 대중스타였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08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