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 기념 무대에 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1990년, 그리고 오늘의 사라 장

사라 장과 오르페우스체임버오케스트라(이하 오르페우스)의 내한 소식을 들었을 때, 선명한 장면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들이 ‘사계’를 공연했던 2007년 5월 1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서 펼쳐진 매우 인상 깊었던 어느 ‘순간’이다.

공연의 2부, 핑크빛 드레스의 사라 장이 특유의 당찬 걸음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오르페우스의 한가운데 서있는 사라 장은 부쩍 여성스럽고 당당해진 모습이었다. 단원들과의 호흡을 이끄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투티와 솔로가 반복되는 ‘사계’의 리토르넬로에서 솔로 바이올린은 한 순간도 진정한 ‘솔로’인 적이 없다. 우리의 눈과 귀가 솔로 바이올린에 머무는 순간에도, 첼로나 비올라가 음향적 효과를 자아내고 쳄발로가 통주저음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사라 장은 자신과 호흡을 맞추는 앙상블 주자들이 바뀔 때마다 그들에게 다가가 때로는 미소를, 때로는 위협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은 오직 눈빛으로만 이뤄지는, 대단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휘’였다.

기분 좋게 긴장감을 유지해온 사라 장과 오르페우스의 ‘사계’가 작품 전체의 종악장인 겨울의 3악장을 맞이했다. 이 악장에는, 얼음 위에서 크게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그 얼음이 깨질 때까지 걷겠다는 소네트가 붙어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이것이 겨울이다. 겨울이 주는 즐거움이다’

바로 그 겨울의 끝자락, 사라 장이 들고 있던 바이올린 활의 털 한 올이 ‘팽’하고 끊어지면서 검은 배경 위로 송진가루가 확 퍼졌다. 내 눈이 카메라라면 꼭 담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 무대가 솔로이든 실내악이든 협주곡이든 간에 사라 장은 무대 위에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연주자라는 걸 다시 한번 절감한 순간이었다. 내가 시인이라면, 활 털이 끊어지며 그녀의 주변으로 송진 가루가 흩날리던 장면에 이런 소네트를 붙였을 것이다. ‘이것이 사라 장이다. 그녀가 주는 즐거움이다’

1990년 처음으로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라

지난해, 우리는 이렇듯 부쩍 성숙해진 모습으로 오르페우스를 이끄는 사라 장을 만났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예술의전당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사라 장은 귀여운 퍼프 소매의 미니 드레스를 입은 열 살 짜리 꼬마였다.

사라 장의 예술의전당 첫 데뷔는 1990년 1월 30일로 기록된다. 사라 장의 국내 데뷔 무대이기도 했던 이날의 공연은 1990년 <예술의전당 신년음악회>였다. 요즘처럼 1월 내내 여러 단체와 공연장이 주최하는 신년음악회가 이어지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그 해의 신년음악회는 더욱 만만치 않은 무게로 꾸며졌다. 1부에서는 정재국의 집박을 시작으로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궁중연례곡을 연주했고, 뒤이어 KBS교향악단과 김덕수 사물놀이가 창작 국악작품을 선보였다. 양악으로 꾸며진 2부는 지휘자 금난새와 KBS교향악단,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의 연주로 채워졌다. 일반적인 열 살 소녀라면 무서우리만큼 거대한 무대였지만 사라 장은 그저 즐거워 보였다. 무대 위의 꼬마 숙녀는 진지하게 눈을 내리깔고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미 보름 전,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에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공연하고 지휘자 주빈 메타의 손에 이끌려 6차례의 커튼콜에 응했던 그 소녀에게 거대한 무대는 그저 거대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나 보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예나 지금이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사라 장에게 두려움의 공간이 아닌 ‘가슴 벅찬’ 공간이다.

오는 6월 4일, 그 무대에서 사라 장이 연주할 작품은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단조 Op.26. 함께 공연하는 오르페우스는 지휘자를 세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며 사라 장과는 이미 수년간 호흡을 맞춰왔다. 지휘자가 없다 보니 모든 단원들의 연주에 디테일이 살아있고 집중력이 높다는 것이 오르페우스만의 매력이다. 일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가 담당하는 매우 디테일한 부분들까지 단원 모두가 직접 관여하며, 악단 내의 지위도 동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공연에서 오르페우스는 브루흐 협주곡 외에도 모차르트 오페라 <이도메네오> 중 발레음악 K.367, 미국 작곡가 조안 타워의 ‘체임버 댄스’, 모차르트 교향곡 35번 D장조 K.385를 공연한다. 2006년 작인 ‘체임버 댄스’는 오르페우스의 위촉곡이며 이번에 한국 초연된다.

이번 공연은 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입니다. 처음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던 때를 기억하세요?
"물론이지요. 콘서트홀의 어쿠스틱이 환상적이어서 무척 인상 깊어했던 기억이 나네요. 또 지금과 마찬가지로 매우 따뜻하고 열광적이었던 한국 관객들도 잊을 수 없고요. 예술의전당은 언제나 제가 선호하는 공연장 중 하나입니다."

예술의전당이 개관했던 1988년, 어느 디너파티 현장에서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의 악장인 노먼 캐럴은 어린 사라 장의 연주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몇 주 뒤에 리카르도 무티 앞에서 오디션을 치렀지요. 당시 사라 씨는 어떤 꼬마였나요?
"아주 평범한 아이였어요! 제 연주를 들은 노먼 캐럴이 당시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었던 리카르도 무티에게 저를 소개했습니다. 그때 이미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던 주빈 메타와의 오디션을 치른 후였지요. 그런 의미에서 1988년은 제가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해였다고 볼 수 있겠네요."

예술의전당 20주년 기념공연에서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공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더불어, 이 작품을 처음 연주한 게 언제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여섯 살 때 이 곡을 들고 줄리어드 음악원 오디션을 치렀어요.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은 제가 늘 사랑해온 작품이지요. 게다가 이번 공연은 협연 무대라서 오르페우스가 소화할 수 있는 협주곡을 골라야 했습니다."

지난 2007년 오르페우스와 ‘사계’를 공연하던 사라 씨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특히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네요.
"오르페우스는 절대 지휘자를 세우지 않는 아주 특별한 앙상블이에요. 언제나 실내악적 견해를 가지고 음악에 접근하지요. ‘사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페우스는 이 작품을 완벽하게 실내악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저는 세계적인 지휘자들을 겪으면서 성장해왔는데, 그래서인지 무대 위에 있을 때 지휘자에게 많이 의존하고 그들의 영향을 받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와 연주하면서 좀더 제 자신을, 제 음악을 믿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누군가의 지시가 없는 무대에서 자신의 눈과 귀를 마음껏 활용하는 법을 알게 됐고요. 2007년 내한 이후 오르페우스와 함께 ‘사계’를 정말 자주 공연했어요. ‘사계’를 들고 미국 투어를 했고 음반도 발매했지요. 이들과 새로운 작품을 함께 한다는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고, 지난 번과 다른 레퍼토리로 한국 청중을 찾아뵙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네요."

이번에도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지휘자 없이 공연하나요?
"물론입니다. 이번에도 제가 연주와 지휘를 겸할 예정이에요."

2007년 내한 때 화제가 되었던 것이 참으로 많이 변한 사라 씨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주 여성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당당했고요. 갑자기 ‘변모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네요. 외모에 변화를 주겠다고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적은 없어요. 1년에 한번 정도 한국에 들르니 다른 분들이 저의 외적인 변화를 느끼는 게 당연한 듯 하고요. 과거의 이미지와 싸워야 하는 것도 제 일이랍니다. 아직도 저를 조그마한 꼬마 신동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거든요. 그런 분들은 음반 커버나 최근에 찍은 저의 사진들을 보면서 깜짝 놀라곤 하세요. ‘아, 사라 장이 더 이상 여덟 살짜리 꼬마가 아니구나’라고 깨닫는 거겠죠."

지난 공연 때, ‘사계’의 매 악장마다 박수가 터져 나와서 개인적으로는 공연 감상의 흐름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온 논쟁거리이지만 사라 씨에게도 묻고 싶네요. 아무 때나 터지는 박수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많은 지휘자들과 연주자들이 악장 간의 박수를 꺼리는 게 사실이지만, 전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공연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상황에 시종일관 노출될 수밖에 없어요. 주의가 산만한 사람, 공연장에 늦게 들어오는 관객, 휴대전화 소리, 사탕 껍질 벗기는 부스럭거림, 콘서트 중에 플래시를 터트리는 사진기자들까지... 그런 와중에 연주를 하다 보니 악장 간의 박수는 그리 방해가 되진 않습니다."

끝으로 향후 음반과 공연 계획에 대해 알려주세요.
"브람스와 브루흐 협주곡 음반이 2009년에 발매될 예정입니다. 공연 일정은 2~3년 후까지 잡혀있는 상태인데 그 중에서도 10월에 있을 한국 공연에 기대가 커요. 에사 페카 살로넨·LA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연주합니다. 살로넨은 제가 좋아하는 핀란드 지휘자 중 한 명인데, 함께 시벨리우스를 연주한다니 더욱 기대가 되네요."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08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