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싱 섀도우」로 우리 뮤지컬에 불을 놓다
신시뮤지컬컴퍼니 대표 박명성


2007년이 시작되던 새해 벽두, 각종 언론 매체에서는 앞 다투어 올해의 기대작을 선정, 발표했다. 여기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캣츠」, 「퀴담」 등 그 명성만으로도 인정할만한 쟁쟁한 해외작품들이 즐비했으나, 그 와중에도 주목을 받는 몇몇 ‘우리 뮤지컬’이 있었다. 그 안에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었으니, 「댄싱 섀도우」가 바로 그것. 이처럼 「댄싱 섀도우」가 올해의 기대작으로 주목을 받았던 건, 「댄싱 섀도우」가 장장 7년이라는 제작기간과 해외 워크숍 개최, 본 공연에 앞서 1년 전 모든 캐스팅을 마치고 쇼케이스를 개최하는 등 국내 뮤지컬 사상 유례없는 길고 긴 준비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신시뮤지컬컴퍼니 박명성 대표가 있다.

소년, 산불에 데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차범석 선생님과 저는 거의 20년간 양아버지-양아들의 관계로 지냈어요. 20년 동안 선생님을 모신 거죠.”

지난 6월 6일 1주기를 맞은 극작가 故 차범석. 뮤지컬 「댄싱 섀도우」는 차범석의 희곡 「산불」을 원작으로 한다. 근 20년간 차범석 양아버지와 양아들의 관계를 맺어 온 박명성 대표가 자신의 첫 번째 ‘우리 뮤지컬’로 「산불」을 원작으로 선택한 것은 전혀 의외가 아니다.(부연하자면 필자는 지난 호에서 ‘창작 뮤지컬’을 ‘한국 뮤지컬’로 개명하길 주장했다. 그리고 박명성 대표는 이를 다시 ‘우리 뮤지컬’로 개칭하길 희망했다. 그는 모든 언론이 ‘창작 뮤지컬’대신 ‘우리 뮤지컬’로 표현을 통일시켜 주길 희망했다) 다시 말해 뮤지컬 「댄싱 섀도우」는 박명성 대표에게 있어 양아버지와 양아들의 관계를 맺어온 차범석에 대한 일종의 헌사다. 그리고 「댄싱 섀도우」는 차범석에 대한 박명성 대표의 오마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댄싱 섀도우」의 원작인 연극 「산불」은 고등학생 박명성을 공연으로 끌어들였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제가 공연에 입문하게 된 게 바로 「산불」때문입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문예회관에서 공연했던 「산불」을 봤는데, 그 작품에 매력에 이끌려서 공연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겁니다.”

「산불」은 산이 아닌, 소년 박명성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명성 대표를 연극판에 뛰어들게 했다. 1982년 박명성 대표는 극단 동인극장과 극단 현대극장에 발을 담그며 본격적인 연극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극단의 막내로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시작한 그는 이후 배우와 조연출을 거치며 연극계에서만 십수 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1990년에 극단 신시가 창단되었고, 드디어 1999년 그는 신시뮤지컬컴퍼니의 대표가 되었다. 이후 신시는 「맘마미아!」와 「아이다」, 「시카고」, 「카바레」, 「갬블러」, 「렌트」, 「유린타운」 등의 굵직굵직한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들을 줄줄이 선보이며 짧은 시간동안 뮤지컬계에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가지는 컴퍼니로 성장하였다.

춤추는 그림자로 어른거리는 산불

「맘마미아!」와 「아이다」 등의 뮤지컬은 흥행 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고 작품 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박명성 대표의 신시뮤지컬컴퍼니는 실패를 몰랐다.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신시뮤지컬컴퍼니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신시뮤지컬컴퍼니에 대한 비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시뮤지컬컴퍼니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라이선스 뮤지컬 수입처’라는 오명에 있었다. ‘우리 뮤지컬’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하던 사람들은 신시뮤지컬컴퍼니에 대해 ‘왜 우리 뮤지컬은 제작하지 않느냐’라 지적했다. 「댄싱 섀도우」가 7년의 제작기간을 거친 작품이란 점을 상기한다면 이 같은 세간의 인식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지만, 답보상태가 꽤 오래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산불」을 뮤지컬로 만든다고 했을 때, 차범석 선생님께서 뮤지컬 대본을 써주시기도 했어요. 아리엘 도르프만이 작품을 각색하기 전에 말입니다. 만일 그 작품으로 공연을 올렸다면 벌써 올렸을 거예요. 하지만 전 「산불」을 완전히 다른 장르의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 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5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던 것이 조금 더 늦어져서 이제야 무대에 올라가게 된 거죠.”

신시뮤지컬컴퍼니를 창단했던 1999년 박명성 대표는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이었던 차범석을 찾아가 「산불」을 원작으로 뮤지컬을 만들 계획을 밝혔다. 차범석은 흔쾌히 이를 허락했고, 이 때부터 그는 해외스태프와 공동작업 등의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이듬해 박명성 대표는 「갬블러」공연차 내한했던 작곡가 에릭 울프슨에게 「산불」의 번역본을 건네주며, 그를 임진각으로 데려가 우리민족의 분단 현실을 보여주었다. 「산불」이 「댄싱 섀도우」로 거듭나기 시작하며 제작의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2002년 이다. 번역된 「산불」 희곡과 뮤지컬 대본을 본 아리엘 도르프만은 “이건 내가 꼭 써야만 하는 작품”이라며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국내에서 신시뮤지컬컴퍼니가 라이선스뮤지컬 수입처로 오명을 쓰고 있던 동안, 해외에서는 신시뮤지컬의 첫 창작품이 소리 소문 없이 제작되고 있던 것. 그리고 2005년 영국에서의 워크숍이 진행되면서 「댄싱 섀도우」는 그림자를 벗기 시작했다. 신시뮤지컬컴퍼니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줄어든 것도 이 때부터의 일이다.

“그동안 우리 뮤지컬계는 보통 극장을 대관한 후에 작품을 만드는 게 상례였습니다. 그러니 작품의 질적인 부분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우리는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기로 했습니다. 공연일정도 작품이 완성된 후에 잡았고요. 이제는 우리 뮤지컬도 변해야 합니다. 신시뮤지컬컴퍼니는 그런 한국 뮤지컬의 방향, 이정표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우리 공연계에 불을 지피는…

항간에는 ‘왜 굳이 해외 스태프여야 하느냐’는 볼멘소리도 있었다. 국내에 크리에이티브 팀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국내에서 불고 있는 한류바람을 타고 해외진출을 위해 해외 스태프를 참여시킨 것이라는 진단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물론 「댄싱 섀도우」를 해외에 진출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아리엘 도르프만이 각색의 과정에서 중점을 둔 것도 ‘은유’와 ‘상징’을 통한 전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명성 대표가 해외스태프를 참여시켰던 데에는 해외진출 외에도 다른 뜻이 있었다. 그동안 아무리 많은 라이선스 뮤지컬을 들여와도 이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 스태프는 어떤 고급 기술도 전수하려 들지 않았다. 선진 노하우를 익히려면 우리 작품에 해외 스태프를 참여시키는 길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리 뮤지컬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보다 빨리 성장하기 위해 밟아야 하는 발판이었다.

“지금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이 급성장하게 된 뒤에는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들이 삽시간에 모두 들어오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서로 유명 작품들을 끌어오다 보니 이미 볼만한 라이선스 뮤지컬이 다 들어왔죠. 덕분에 뮤지컬 시장은 양적으로 확대됐으니 이제는 질로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온 거죠. 이제는 질이 좋은 뮤지컬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앞으로는 우리 작품을 잘 제작하는 컴퍼니가 신新 메이저 컴퍼니가 될 겁니다.”

박명성 대표는 이를 위해 앞으로 매년 1년에 한 작품씩 ‘우리 뮤지컬’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며, 이 계획은 이미 실천되고 있다. 박명성 대표는 3년 전부터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황지우 원작의 「오월의 신부」를 뮤지컬로 준비 중에 있다. 박명성 대표의 야심은 이를 통해 신시뮤지컬컴퍼니를 신 메이저 컴퍼니로 등극시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의 보다 큰 야심은 신시뮤지컬컴퍼니가 「댄싱 섀도우」를 통해 한국 뮤지컬의 지형도를 변형시키는 데에 있다. 과감한 투자와 철저한 준비를 겸하는 제작시스템의 변화와 크리에이티브 인력의 발굴, 육성을 통해 양적으로 팽창된 뮤지컬계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박명성 대표의 야망의 전부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박명성 대표의 궁극적인 야망은 문화, 공연문화 전반에 활성화에 있다. 뮤지컬컴퍼니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서울연극협회장으로서 박명성의 포부다. 그리고 근 30년 동안 공연계에 몸을 담은 연극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야망이다.

“기초순수예술이 살아야죠. 기초예술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다른 예술들도 성장할 수 있는데, 지금은 너무 불균형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저는 지금은 과도기라고 생각합니다. 2, 3년 후에는 연극도 활성화, 대중화 되어야 하겠습니다. 대학로도 더 이상 유흥의 거리가 아닌 문화특구로 자리 잡도록 만들어야죠.”

30년 전 한 소년이 「산불」에 데였듯, 「댄싱 새도우」가 관객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길, 나아가 그가 우리 공연계에 불을 놓길 기대해 본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07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