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토월정통연극시리즈 Ⅸ
「사랑과 우연의 장난」 연출가 임영웅


#1. 주례사
연출가 임영웅은 이따금 결혼식 주례를 맡는다. 주례사를 미리 적어놓지 않고 즉석에서 말하는 게 그의 스타일이다. 길게 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어떤 형식이 됐건 세 가지 이야기는 꼭 들어간다고 했다. 하나, 살다가 문제가 생겼을 땐 오늘의 뜨거운 사랑과 맹세를 생각하세요. 둘, 좋은 친구처럼 이해하고 양보하며 사세요. 셋, ‘우리식구’, ‘우리집안’에만 갇히지 말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가정을 꾸미세요.

#2. 비극 혹은 희극
결혼은, 아니 삶은 희극일까. “No”라고 단언하는 사람들도 많다. 러시아 말리 극장의 유명한 연출가 레프 도진은 “처음과 끝이 있으니까, 삶은 비극”이라고 했었다. 임영웅은 달랐다. “바라보기에 따라 비극일 수도, 희극일 수도 있다”“비극이라고 느끼는 건 기쁨은 금방 잊혀지지만 슬픔은 오래 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희비극이다.
극장에서 그는 주로 비극을 빚어냈다. 1970년대 올린 피터 쉐퍼의 「블랙 코메디」, 조해일의 「건강 진단」 같은 작품은 임영웅 연출 이력에서 이례적인 희극이었다. 왜일까? “선입견 때문인지 나한텐 희극 의뢰를 안 하더라”며 연출가는 웃었다. “연극사에 남는 명작들은 다 비극 아니냐”고도 했다.

#3. 희극 연출
그 임영웅이 오랜만에 희극을 올린다. 6월 13일(수)부터 7월 1일(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을 채울 바로 「사랑과 우연의 장난」이다. 프랑스 극작가 피에르 드 마리보의 1730년 초연작. 신분 차별이 엄존했던 시대에 젊은 귀족 남녀가 결혼을 둘러싸고 벌이는 놀이를 따라간다. 예술 작업으로서 희극은 비극과 많이 다를까.
연출가는 “희극이든 비극이든 연출은 마찬가지”라고 잘라 말했다.

“연극엔 다 리듬이 있어요. 희극의 경우는 그 리듬이 정확하고 경쾌해야 하고, 연습량이 많아야 하지. 즉흥극처럼 보여도 훈련된 것이어야 하니까.”

임영웅은 “어떻게 보면 희극 잘 만들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비극은 어물어물 넘어가는 부분도 있는데, 희극은 배우는 진지하고 관객은 웃어야 하기 때문.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4~5월 산울림 소극장) 「산불」(6월 국립극장)과 거의 동시에 「사랑과 우연의 장난」을 준비 중인 연출가는 그래도 “다른 두 작품보단 성격이 분명해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4. 왜?
「사랑과 우연의 장난」은 연출가가 직접 고른 코미디다. 예술의전당이 아서 밀러의 「시련」(연출 윤호진)을 하기로 결정한 뒤라 다시 심각한 연극을 꺼낼 순 없었단다. 임영웅은 몰리에르와 마리보를 저울질하다 마리보 쪽으로 기울었다. 국내 극단에서 본격적으로 공연한 적이 없는 극작가라서다.

“작품이 재미있어요. 단순 명료하고 여성의 미묘한 심리를 잘 그려 지금 봐도 썩 괜찮아요. 또 요즘처럼 정신세계가 황폐한 때 이런 사랑이야기가 공감이 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할 때 사람이 아니라 배경을 따지는 풍조잖아요. 특히 여성에게 시사하는 게 많은 작품입니다.”

연출가는 “사랑 예찬인 동시에 ‘인간은 평등하다’가 이 연극의 메시지”라고 했다. 주로 현대극을 하다 최근에야 체호프와 입센의 작품을 올렸던 임영웅은 점차 근대극, 고전극을 거쳐 희랍비극까지 올라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거장 연출가가 예술의전당에서 연극을 공연하긴 이번이 처음. 우연만은 아니었다. 임영웅에겐 1년 내내 책임져야 할 산울림 소극장이 있었다.


#5. 역할 바꾸기
「사랑과 우연의 장난」의 가장 큰 재미는 역할 바꾸기에서 온다. 결혼을 앞두고 맞선을 보게 된 귀족 처녀 실비아와 귀족 청년 도랑트가 주인공. 상대방의 됨됨이를 파악하고 싶어하는 둘은 거짓말처럼 똑같이 하인으로 위장한다. 사실 역할 바꾸기는 흔하고 고전적인 극작술이다. 쌍둥이를 오해해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로마 희극 「메내크미」, 남장 여자가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임영웅은 그러나 “「사랑과 우연의 장난」은 반전이 4번 나올 만큼 단순한 역할 바꾸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형사 콜롬보>식이에요. 극이 진전되고 나중에 밝혀지는 코미디가 아니라 관객에겐 다 알려주고 시작합니다. 작가로서 자신이 없으면 힘이 달리는 형식이에요.”

#6. 연출가와 배우
학창시절엔 주인공부터 단역까지 배우도 했지만 “배우에겐 배우의 몫이 따로 있다”는 게 이 연출가의 말이다. 물론 정 답답하면 무대로 나가 시범을 보일 때도 있다. 특히 「고도를 기다리며」 포조역의 경우, 배우들도 반 농담으로 “포조는 선생님이 하면 좋겠다”고 한단다. ‘연출가-배우’는 어떤 관계일까? 임영웅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배우가 해준다. 연극적으론 배우를 혹사시켜도 인간적으론 감싸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소문처럼 ‘무서운 연출가’일까. 임영웅은 “배우들에게 엄격하고 철저한 건 다 작품을 위해서”라며 “나랑 작업하면 편하다는 배우들도 여럿 있다”고 말했다. “연출은 ‘숨은 그림 찾기’ 같아요. 대본엔 설명이 안 돼 있지만 연출이 숨은 걸 찾아내야 합니다. 힘든 걸 요구해도 군소리 않하고 따라오게 하려면 배우가 재산이에요. 60년대 명동 소극장에서 연습할 때, 난 서서 했습니다. 배우들만 의자에 앉혔지요.”

#7. 사랑과 결혼
「사랑과 우연의 장난」을 만들고 있는 연출가는 “사랑은 우연일 수도, 필연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천생연분’이란 말 있지요? 어차피 만나게 될 사람이 우연히 만나는 경우에요. 맺어지는 건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실비아와 도랑트는 이 작품의 해피엔딩 이후에도 잘 살까. 연출가는 “그런 과정을 안 거치고 결혼한 것보다는 잘 살 것”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한 후 속았다고 한다’고 하자, 임영웅은 “어쩔 수 없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같이 살아야 하는 게 결혼이니까”라고 말했다. “오래 산 부부도 상처줄까봐 끝까지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 법”이라고도 했다.

배우자라는 건 결국 오래 살면 좋은 친구가 된다는 게 그의 사랑관이다. “남녀간에 친구가 안 된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열정이나 애정은 수십 년 지속되는 게 아니에요. 남는 건 우정입니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07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