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압도하는 거대한 진실의 힘
「시련」 연출로 연극 무대 돌아온 윤호진


연출가 윤호진에게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남다른 구석이 있다. 뮤지컬 시장의 불모지와 같던 이 땅에 십 수억의 제작비를 들인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를 선보였고, 모두가 이르다며 말릴 때 이 작품을 세계로 내보내 한국 뮤지컬의 자긍심을 높였다. 그리고 이제 100만 관객 돌파로 우리 뮤지컬의 새 역사를 쓰게 된 바로 그 순간, 그는 20여 년간 마음속에 품어온 작품 하나를 들고 다시 연극무대로 돌아왔다. ‘토월정통연극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은 16년 만에 연극무대로 돌아온 윤호진의 야심작, 아서 밀러의 「시련」이다.

오랜만에 연극무대로 돌아왔는데, 기분이 남다를 듯 하다.
"남다를 것은 없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련」은 개인적으로 워낙 미련이 많이 남은 작품이어서 이제야 제대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서 밀러의 「시련」은 예전부터 계속 마음에 품고 있던 작품이라 들었다. 이 작품에 특별히 애착을 갖는 이유가 있는지?
"처음 「시련」을 읽었을 때, 정말 손 한번 떼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다 읽고나니 한대 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는 유신정권 말기로 지성인들의 치열한 반성과 사회 정의에 대한 물음이 강했던 시절이라 이 작품이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마침 양심수 이야기인 「아일랜드」를 올린 직후였는데, 유신정권에 대한 내 나름의 비판을 담아 이 작품을 준비하던 중 10. 26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그 뒤로도 포기하지 못하고 매년 해야지, 해야지 하다보니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긴 세월 동안 마음속에서는 이미 몇 번이나 올렸던 작품이다 보니, 무대와 장면, 인물 캐릭터에 대한 구상이 머릿속에 다 들어있다. 「시련」은 ‘메가톤’ 급의 감동을 지닌 작품이다. 메시지가 강하면서도 연극적인 특성을 잘 갖추고 있는 작품이어서 제대로 무대에 올려진다면 관객들 모두가 연극이 갖는 진짜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련」에서 밀러는 17세기 ‘세일럼의 마녀재판’이란 연극적 프리즘을 통해 1950년대 매카시즘을 강하게 비판했고, 많은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작품이 발표된 지 50년이 더 지난 지금, 이 작품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다고 보는가?
"「시련」은 17세기 세일럼이란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사소한 거짓말이 사람들의 이익과 사회구조와 얽히면서 결국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비극의 과정을 통째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지 매카시즘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참으로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가.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잘 살아보겠다는 이기심이 사회구조 안에서 어떤 현상과 결과를 불러일으키는가.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남을 매도하고 해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최근에는 익명성을 지닌 인터넷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사람들의 의견 노출이 과격해진데다 몰아붙이기 식의 여론이 쉽게 만들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더 문제인 것은 정의나 양심에 대해 고민하는 분위기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시련」을 통해 사회 정의라는 게 무엇인지,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의 양심은 어떻게 버티고 살아남아야 하는지 관객들이 스스로에게 묻게 하고 싶다. 관객들이 고민하고 변화하게 만들고 싶다."


주요 배역은 아직 오디션 중이라 들었다. 남녀 주인공인 애비게일과 프록터 역은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있는가?
"애비게일 역을 맡을 여배우는 광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서운 집념, 프록터에 대한 편집증같은 욕정이 온 몸에서 흘러넘쳐야 한다. 또 이것이 한번 돌아섰을 때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차갑고 싸늘한 악으로 변하는데, 이를 눈빛 하나만으로 표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 한편 프록터는 우선 멋있어야 한다. 평범한 농부일 뿐이지만 애비게일이 그렇게 안달할 만큼 남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념이다. 그는 비록 지식도 교양도 없는 일개 농부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양심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실 그의 이름 자체가 이미 ‘심판자’, ‘감독자’란 의미를 담고 있다) 프록터의 마지막 결정은 죄악과 위선으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도 인간 존재를 긍정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약하고 쉽게 유혹에 빠지지만 반면에 이토록 숭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관객들은 전율하게 된다."

이번에 「시련」을 무대에 올리는 데 있어 연출가로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연극의 기본 정신을 복원하고 싶다. 요즘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 유행인 것 같은데, 파격도 좋고 실험도 좋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오리지널이 제대로 갖추어진 다음에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연극무대에는 변형, 각색된 것들만 난무하고 오히려 오리지널리티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이번 무대에서는 이게 ‘진짜 연극’이라는 걸 좀 보여주고 싶다. 잘 훈련된 배우들을 통해 원작의 힘을 제대로 보여줄 것이다."

「시련」을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어 왔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들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희곡엔 나오지 않지만, 첫 장면에서 숲 속에서 벌어지는 소녀들의 마녀놀이를 직접 보여줄 예정이다. 지난 번 「겨울 나그네」 무대에 썼던 숲 세트를 아직 보관하고 있는데, 토월극장은 무대가 깊으니까 뒤편에 배경으로 쓰면 좋을 듯 하다. 흐릿한 안개 속에 들려오는 주술적인 노래와 희미하게 돌아가는 여자아이들의 춤은 첫 장면부터 관객들을 압도시킬 것이다. 또 주특기 중 하나인 디테일한 심리 묘사를 잘 살려서, 프록터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잘 잡아내고자 한다.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에게 본심을 숨긴 채 생활하고,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드러나는 두 사람의 애절한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싶다.
전체적으로 흐름이 매끄럽게 만들면서도 법정 장면과 프록터가 마지막 선택을 하는 장면은 악센트를 주어서 관객에게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특히 법정 장면 중 인간의 광증을 제대로 보여주는 소녀들의 집단 히스테리 증상 장면에서는 무대와 객석이 함께 뒤집어져야 한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은 마치 광증이 전염된 듯 모골이 송연하고 솜털이 다 서게 될 것이다."


작품이 가진 강한 메시지와 함께 「시련」의 연극적인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주역인 애비게일과 프록터 말고도 가일즈, 패리스, 레베카, 메어리 등 조역들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생생한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각 역할에 좋은 배우들이 제대로만 서 준다면, 아마 「시련」은 그대로도 완전한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레베카가 나오기만 해도 배우와 관객 모두가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로받는 느낌이 들게 되고, 애비게일과 소녀들이 떼로 등장하면, 그 자체로 모두가 공포감에 떨게 될 것이다. 20년 전 이 작품을 처음 올리려고 했을 때도 이정길, 이낙훈, 최형인 등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연습했었는데, 당시 연습실을 찾은 사람들 모두가 이미 연습이 아니라 완성된 공연 같다고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시련」의 인물 중에는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도 있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도덕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단지 이러한 기준은 누구나 다른데, 스스로 생각하는 도덕적 잣대,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자연성, 순리에 의한 깨달음이 아닐까. 프록터나 레베카가 많이 배우고 똑똑해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불의와 거짓을 거부하듯이 말이다. 극중 헤일 목사는 자기가 쌓아온 지식을 믿고 자만하지만, 결국 모든 일이 지식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논리와 증거가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의 감정으로부터 프록터가 무죄라는 것을 느끼고 확신한다. 진실 앞에 선 사람들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진실임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 작품을 보고나서 관객 모두가 프록터처럼 불의에 항거하는 투사가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헤일 같은 깨달음만큼은 얻어가길 바란다."

뮤지컬과는 다른 연극의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현재 공연계에는 뮤지컬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어찌 보면 바로 내가 그 원인을 만든 것 같기도 한데(웃음), 연극은 오락일 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없어져서는 안 되고 또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뮤지컬로 어느 정도 재정 자립도를 갖추었으니 앞으로는 1년에 한편 정도 꼭 연극을 올릴 예정이다."

「시련」 외에 또 마음에 품고 있는 작품이 있는가?
"전에 「아일랜드」 공연 마치고 「시련」 준비하면서 일련의 ‘양심시리즈’를 기획했었다. 마음만 먹고 올리지 못했던 이 시리즈를 이제 천천히 하나씩 올리려고 한다. 우선 내년에는 카프카의 「심판」을 공연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이 작품도 정말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출처 :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07년 3월호)